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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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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와 큐트 사이, 무엇을 잃었나


아이돌에 음악 자본을 쏟아붓고 섹시댄스에 온 국민이 열광하는 한국,
떼거리 걸그룹의 원조 일본에는 없는 것
등록 2010-02-04 13:24 수정 2020-05-03 04:25
섹시와 큐트 사이, 무엇을 잃었나

섹시와 큐트 사이, 무엇을 잃었나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연세대 단기 연수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본 호세이대 여학생들에게 한국의 대중문화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한국어에 익숙지 않은 학생들에게 강의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한국과 일본의 걸그룹을 비교한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첫 수업을 시작했다. 소녀시대·2NE1·원더걸스·카라·애프터스쿨·브라운아이드걸스·포미닛 등 한국의 잘나가는 걸그룹과 큐트·베리즈코보·퍼퓸·모닝구무스메·AKB48·보노 등 일본의 인기 걸그룹이 교차돼 나오는 동영상은 영락없이 한·일 걸그룹 배틀신이었다. 동영상을 보여준 뒤 나는 일본 여학생들에게 양국 걸그룹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소녀티를 벗자 소녀시대 성공

대다수 일본 학생들은 한국의 걸그룹은 섹시하고 역동적인 반면, 일본 걸그룹은 귀엽고 아기자기하다고 말했다. 그룹마다 추구하는 음악적 스타일이 다르지만, 한국의 걸그룹은 대개 예외 없이 빼어난 각선미와 요염한 표정, 섹시한 춤과 의상을 선보인다. 지난해 SM엔터테인먼트 매출의 1등 공신이었던 소녀시대의 성공 비결은 섹시 코드로의 전환이다. (Gee)의 상큼 발랄한 멜로디와 형광색 핫팬츠를 더 짧게 만드는 롱다리는 귀여운 소녀티를 벗어버리고 섹시한 자태를 뽐냈다. 에서 선보인 ‘밀리터리 룩’과 허리와 허벅지의 각선미를 부각시킨 ‘댄스 레시피’는 정확하게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공략 지점으로 삼는다. 소녀시대보다 더 도발적인 선정성을 보여준 브라운아이드걸스와 애프터스쿨의 스타일은 성인 무대에서 볼 수 있는 클럽 쇼걸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반면 일본 걸그룹은 대부분 귀엽고 앙증맞은 표정과 스타일이 주를 이룬다. 2006년 ‘헬로 루키’ 프로젝트로 데뷔한 큐트는 헤어스타일, 의상, 액세서리 코드, 메이크업, 멜로디, 가사 모두에서 미소녀의 이미지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큐트와 같이 헬로 루키 프로젝트에서 발탁된 베리즈코보 역시 주된 코드는 귀여움이다. 일본 아이돌 팝에서 롤리타 신드롬을 일으켰던 AKB48의 멤버들 역시 데뷔 시점이 10대 초·중반으로 핫미니스커트의 교복과 앙증맞은 표정, 미성의 목소리가 트렌드마크다. 아키하바라 전자상가 전용극장에서 100명이 넘는 멤버들이 돌아가며 매일 밤 펼치는 AKB48의 콘서트의 주된 콘셉트는 미소녀 천사들의 상큼한 합창이다. 일본 걸그룹의 코디네이션은 주로 ‘교복’과 ‘삐삐머리’, 약간 상기된 ‘볼 메이크업’과 발목 위로 올라온 ‘루즈 삭스’를 선호한다. 그리고 간혹 의 주인공 샤틴의 코르셋을 연상시키는 도발적 의상들조차도 한국 걸그룹의 섹시 코드와는 다르게 성적으로 과잉된 ‘미소녀’의 이미지를 유지한다.

한국 걸그룹은 예외 없이 빼어난 각선미와 요염한 표정, 섹시한 춤과 의상을 선보인다. 직설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섹시 코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애프터스쿨·원더걸스·소녀시대·2NE1. 플레디스·JYP엔터테인먼트·SM엔터테인먼트·YG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 걸그룹은 예외 없이 빼어난 각선미와 요염한 표정, 섹시한 춤과 의상을 선보인다. 직설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섹시 코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애프터스쿨·원더걸스·소녀시대·2NE1. 플레디스·JYP엔터테인먼트·SM엔터테인먼트·YG엔터테인먼트· 제공

얼핏 보면 한국의 걸그룹은 지나치게 혹은 의도적으로 야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애쓰는 반면, 일본 걸그룹은 소녀 아이돌 본연의 순수한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한국 걸그룹의 섹시 코드나 일본 걸그룹의 큐티 코드는 모두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다른 방식으로 자극한다. 한국 걸그룹의 섹시 코드가 직설적이고 날것 그대로라면, 일본의 큐티 코드는 간접적이고 비밀스럽다. 일본 걸그룹의 의상에 교복과 루즈 삭스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순수함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성적 페티시즘의 한 유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일본 걸그룹에 대한 남성 팬들의 폭발적인 반응은 성적 페티시즘과 무관하지 않다.

아이돌 팝에 올인하는 한국 대중음악
일본의 큐티 코드는 간접적이고 비밀스럽다. 일본 걸그룹은 대부분 귀엽고 앙증맞은 표정과 스타일이 주를 이룬다. 이들이 주로 입는 교복 스타일은 순수해 보이면서 성적 페티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맨 위부터) 모닝구무스메·큐트·베리즈코보. 엠넷 제공

일본의 큐티 코드는 간접적이고 비밀스럽다. 일본 걸그룹은 대부분 귀엽고 앙증맞은 표정과 스타일이 주를 이룬다. 이들이 주로 입는 교복 스타일은 순수해 보이면서 성적 페티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맨 위부터) 모닝구무스메·큐트·베리즈코보. 엠넷 제공

일본 걸그룹의 노래나 춤, 의상을 접한 한국 팬들은 간혹 한국의 걸그룹과 비교하면서 촌스럽고 엉성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늘씬한 신체적 조건, 잘 짜인 안무, 역동적인 춤, 최신 전자 샘플링 음원이 동원되는 한국 걸그룹에 비해 일본 걸그룹은 뭔가 어설퍼 보인다. 신체적 조건이 8등신 미인과는 거리가 멀고, 춤도 조금 조잡하고, 다리도 뭉뚝하다. 노래를 들어보면 몇몇 걸그룹은 ‘뽕기’ 나는 ‘엔카’ 리듬에 가끔 뜬금없이 스피드 메탈 비트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력의 차이라기보다는 걸그룹을 소비하는 대중음악 신의 문화적 차이다. 한국 걸그룹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훨씬 세련돼 보이는 것은 아이돌 팝시장에 올인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특성이 작용한다. 연예 제작의 모든 에너지와 노하우는 아이돌 팝시장으로 흡입된다. 한국 음악산업에서 아이돌 팝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지만, 일본에서는 다양한 음악 장르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아이돌 그룹에 투자되는 자본의 양이 클수록, 이들에게 부여되는 새로운 유행 형식과 스타일은 더욱 급격하게 진화된다. 요즘 걸그룹 배틀의 승부처는 노래가 아닌 스타일에 있다. 한국 걸그룹을 제작하는 시스템의 음악적 원천들이 모두 상이한 참고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한국 걸그룹의 특이한 경쟁력 조건이다. SM엔터테인먼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걸그룹의 장단점 등을 파악해서 한국적 토착화에 공을 들였고, JYP엔터테인먼트는 1970~80년대 미국 흑인 여성 솔 보컬그룹의 명성을 재현하려 했다. YG엔터테인먼트는 일탈적이고 하위 문화적인 여성 힙합 코드를 내세워 2NE1을 탄생시켰고, DSP엔터테인먼트는 핑클 시절부터 가장 토착적인 댄스그룹 스타일을 만들었다.

이에 반해 일본 걸그룹은 일본적인 음악적 원천을 많이 참고하려 한다. 일본 걸그룹의 음악에는 일본 음악 특유의 펑키한 리듬, 빠른 비트와 느린 멜로디의 공존, 전통 엔카 리듬이 많이 배어 있다.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한국 걸그룹의 음악 형식이 훨씬 글로벌한 반면, 일본의 걸그룹은 비교적 전통적이고 토착화된 사운드에 충실하다.

사생활 없는 합숙, 쉴 날 없는 스케줄…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한국 걸그룹이 문화적으로 우세하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아이돌 팝을 제작하고 그것을 음악적으로 재현하는 시스템은 일본이 훨씬 앞서 있기 때문이다. 일본 아이돌 팝의 수익 구조는 음반·음원·방송·공연·프로모션 등이 모두 균형 있게 이루어졌지만, 한국은 대개 인기를 바탕으로 한 행사와 광고가 주 수익원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걸그룹은 너무 지쳐 있다. 음악 프로그램, 쇼·오락 프로그램, 행사, CF, 라디오 게스트, 화보 촬영 등으로 하루도 쉴 날이 없다. 그렇게 ‘빡세게’ 돌리니 평균수명이 5년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일본 걸그룹은 다르다. 바쁜 거야 다르지 않겠지만, 이들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잡지 않고 나름대로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활동한다. 일정이 끝나면 완전히 개인 사생활이 봉쇄되는 한국식 합숙 같은 것은 아예 없다. 1997년에 데뷔한 모닝구무스메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모든 인생을 아이돌 팝스타에 거는 한국의 어린 연예인 지망생, 아이돌을 급하게 소비하고 유통기간이 지나면 바로 버리는 연예제작사, 온 나라가 걸그룹의 ‘섹시댄스’와 ‘꿀벅지’에 탐닉하는 상황은 분명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걸그룹 전성시대가 유쾌하지만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문화예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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