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무한도전! 컴퓨터그래픽/ 김경아
“비디오 킬 더 라디오 스타~.” 1980년대 초, 영국의 팝그룹 버글스는 노래로 라디오의 슬픈 운명을 예견했다. 하지만 30여 년이 흐른 지금, 라디오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죽지도 않고 또 오는 각설이,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살아남았다. 텔레비전에 밀려도, 인터넷에 치여도 라디오는 건재하다.
인터넷을 만난 라디오는 청취자의 실시간 참여를 이끌고, ‘보이는 라디오’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스마트폰 등 새로운 매체로의 진입도 준비 중이다. 청취자의 달라진 생활 패턴은 라디오 편성에 변화를 가져왔다. 아침 7시, 출근길 청취자는 음악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 저널리즘’이란 새로운 영역이 열렸다. 청소년이 주 타깃이던 밤 10시대는 청취자층을 넓혔다. SBS (이하 )는 텔레비전의 영역을 치고 들어갔다. 동명의 TV쇼로 탄생해 케이블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이 됐다. 오래된 매체지만 늘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라디오는 지금도 무한 변신 중이다.
오후 2시 지상 과제 “웃겨라”하루 중 라디오 청취율이 가장 높은 시간대는 언제일까? 오후 2시다. 점심 먹고 잠이 소르르 오는 그때, 사람들은 졸음을 쫓기 위해 라디오 채널의 볼륨을 높인다. 2시대 지상파 FM방송 DJ들의 숙제는 ‘사람들을 웃겨라’다. 한국방송 의 서경석, SBS 의 ‘컬투’ 정찬우·김태균, 문화방송 의 박명수가 청취자의 웃음 사냥에 나선다. 입담 좋은 개그맨들이 라디오 청취율이 가장 높은 시간대를 책임지고 있는 건 토크가 중심이 된 최근 라디오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은지향 PD는 “청취자는 라디오에서 재미를 원한다”며 “2005년 5월에 시작한 가 대학로 개그무대를 옮겨온 듯 2시 시간대를 시끌벅적하게 만들면서 타 방송사들도 동시간을 개그맨들의 수다로 채우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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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30일 찾은 서울 목동 SBS 본사 라디오 스튜디오에서는 생방송 준비가 한창이었다. 는 매일 청취자를 초대해 공개방송 형식으로 생방송을 진행한다. 방송 시작 10분 전, 이날 방송에 참여할 방청객 30명이 라디오 부스로 입장한다. 엄마 품에 안긴 갓난아기부터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까지 라디오를 찾은 이들의 성별과 나이는 다양했다. 작가가 사람들을 앉히며 말한다. “입이랑 손이랑 놀지 않게 많이 웃고 박수쳐주세요. 컬투 보면 ‘연예인이다’ ‘잘생겼다’ 칭찬도 해주시고요.” 여성 방청객들이 까르르 웃는다.
온에어. 빨간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마른기침을 삼킨다. 컬투의 신명 나는 인사말이 끝나고 노래가 흘러나오자 방청객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방송 중간에도 방청객은 대학로 개그 공연을 보러 온 듯, 떠들고 웃으며 DJ와 대화를 나눴다. 컬투가 “달리는 고속버스에서 물냉면을 먹었다”는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자, 방청객 중 한 명이 “시내버스 운전사인데 컵라면에 물 부어 먹는 것도 봤다”며 추임새를 넣는다.
SBS 라디오 <컬투쇼>는 텔레비전의 영역을 치고 들어갔다. 동명의 TV쇼로 탄생해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 중이다. 생방송 <컬투쇼>가 진행 중인 라디오 부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라디오 부스에는 컬투와 방청객 외에도 4대의 카메라가 더 있다. SBS 케이블 채널인 ETV 카메라다. 2009년 11월부터 ETV는 2시간짜리 를 촬영해 1시간으로 압축한 뒤, 자막을 넣은 동명의 TV쇼를 만들어 월~토요일 밤 9시에 방송하고 있다. 카메라 1대로 고정해 보여주던 인터넷 ‘보이는 라디오’의 확장판이다. 방송을 내보낸 지 두 달여, 는 라디오 청취율 1위 프로그램답게 TV쇼로도 반응이 좋다. 방송사 자체 시청률 1위를 차지할 정도다. 엄마와 함께 온 방청객 황유미(19)씨도 “낮 시간에 라디오를 들을 수 없어 밤에 TV로 즐겨 보다 생방송 현장까지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SBS 플러스 안상남 차장은 “라디오의 타깃 시청층과 오락채널인 TV 시청자 타깃층이 비슷해 TV와 라디오를 결합한 프로그램을 생각하게 됐다”며 “개그맨 컬투의 입담과 방청객이 함께하는 공개방송 형식이 TV 방송을 가능케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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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실험으로 예능 프로그램의 영역을 넘보는 라디오는 이미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의 영향력도 위협하는 수준이다. 출근 시간인 아침 7시대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들이 이제 하나의 저널리즘 영역을 구축해 다양한 이슈를 쏟아낸다. 문화방송 , CBS , 불교방송 등이 아침 시사 프로그램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날그날 관심의 초점이 되는 정치인 등 유명 인사를 인터뷰하면 그 내용이 다른 매체를 통해 여러 형태의 기사로 재생산되면서 ‘라디오 저널리즘’의 세계를 열었다.
청취자가 선호하는 프로그램 형태도 바뀌었다. “초창기엔 뉴스 종합물 방식을 선호했지만 이제는 인터뷰쇼 형식의 시사 프로그램이 인기”(CBS 손근필 PD)다.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인들도 영상보다 자신의 발언에만 집중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을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할 말 있는 정치인들은 인기 프로그램에 먼저 출연 제의를 요청하기도 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국민과의 대화’를 라디오로 시도했다. 2008년 10월에 시작한 주례연설은 논란 속에 여전히 진행 중이다.
손근필 PD는 “출퇴근길에 음악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시사 문제에 관심을 쏟는 청취자가 늘었다”며 “‘국민과의 대화’는 대통령이 원한 국민과의 소통 1차 목표는 실패, 다양한 형태로 기사화되면서 이슈를 만드는 2차 목표는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낮 시간을 평정한 개그맨들의 수다, 라디오 저널리즘의 탄생은 라디오 청취자의 청취 패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국리서치가 조사한 2009년 11월 청취율 조사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은 주로 △자동차로 이동할 때(53.1%) △차 안에 있는 카오디오로(55.4%) △습관적으로(26.1%) 라디오를 듣는다. 특정 프로그램을 선호하기보다 좋아하는 채널에 주파수를 고정해놓고(49.5%), 음악과 토크를 함께 하는 종합 구성물(32.1%) 형태를 주로 청취한다. 한국리서치 임정관 차장은 “10년 전 조사 자료를 보면 청취자는 주로 집에서 좋아하는 진행자의 프로그램을 골라 들었다”며 “이제는 청취자의 생활 패턴이 달라지면서 라디오 프로그램도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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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시간대 청취자도 청소년층을 넘어서는 양상이다. <키스 더 라디오> 진행자인 슈퍼주니어의 이특과 은혁. 한국방송 제공
청소년이 주 타깃인 밤 10시대 이후도 청취자층이 분화되는 양상이다. 슈퍼주니어의 이특과 은혁이 DJ를 맡은 한국방송 를 제외하면 가수 김범수와 스윗소로우가 각각 진행을 맡은 문화방송 와 SBS 은 20대 이상까지 타깃층으로 흡수한다. 문화방송 김도인 라디오편성기획팀 부장은 “인터넷이 청소년을 라디오에서 멀어지게 하면서 변화가 필요했다”며 “인기 아이돌을 좇는 10대들 외에도 다양한 청취자의 취향을 고려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스마트폰 시대를 준비할 때”라디오를 떠나간 청취자를 불러모으기 위해 각 방송사는 2006년 앞다퉈 인터넷 라디오 수신기를 내놓았다. 라디오가 다른 업무와 병행하면서 동시에 소비하는 속성을 지닌 매체라는 점, 1대1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한다는 점을 고려했다. 2009년 3월, 문화방송 인터넷 수신기 ‘미니’는 방송사 최초로 다운로드 건수가 1천만 건을 넘어섰다.
의 TV 영역 침범은 라디오와 MP3, 인터넷 등 새로운 매체의 융합을 암시하기도 한다. SBS 플러스 안상남 차장은 “이제는 라디오가 스마트폰 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라며 “볼 수도 있지만 듣는 재미가 큰 라디오 콘텐츠를 스마트폰용 어플리케이션(응용상품)으로 넣기 위해 통신사와 접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방송 김도인 부장도 “라디오가 새로운 미디어와 융합해가며 변한 듯 보이지만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인간적인 매체라는 점은 늘 변함이 없었다”면서 “사람들이 왜 라디오를 듣나를 떠올리면 라디오가 가야 할 길이 보인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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