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장례식에서 놀고 피 터지게 놀고

한국의 놀이문화 다룬 민속학자 유승훈의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등록 2009-12-10 04:50 수정 2020-05-02 19:25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영화화되기도 한 이청준의 소설 는 장례식 이야기다. 장례식이 축제가 되는 것은 비단 ‘은유’만이 아니다. 중국의 ‘고려전’에는 “장례를 하면 북 치고 춤추며 노래 부르는 가운데 주검을 묘지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까지도 이 풍속은 이어졌다.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오시’라는 장례놀이가 있었다. 영구를 안치한 뒤에 장막을 쳐놓고 크게 노는 것이다. 성리학자들 눈에는 큰일날 일이었다. “신이 들으니, 전라도와 경상도 양도의 풍속에 어버이상을 당하면… 중과 속인을 모아서 잡희를 올리고 밤새도록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춘다고 합니다. 실로 풍속과 교화에 크게 누가 되는 것으로 엄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종 시절 대사헌 송영은 간곡히 임금께 아뢰었다. 대답하는 성종의 말에서 또 하나를 엿볼 수 있는데, “가슴을 치고 통곡해야 할 때에 남정네와 여인들이 뒤섞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상례의 기강을 무너뜨림이 이렇게 심하니, 인간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차마 듣지 못할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놀이에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장례 놀이에서 ‘출산극’도

장례 놀이는 여기서 더 나간다. 진도의 ‘다시래기’는 엄중한 유교 전통을 견디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장례식의 ‘놀이’다. ‘다시래기’란 ‘다시 나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죽음을 생명의 재탄생으로 기린 것인데, 이 다시래기의 진미에는 ‘사당출산놀이’가 있다. 전문 사당패가 아이를 낳는 연극을 벌이는 것이다.

한국 고유의 놀이문화를 찾아 숨결을 더듬은 (월간미술 펴냄)는 한국인의 질펀한 ‘놀기 본색’을 보여준다. 장례식장에서도 놀았으니 때를 놓치지 않는 놀이는 얼마나 많겠나. 불꽃놀이·격구·매사냥 등 귀족풍 고급 놀이부터 청량에 물 담그는 일종의 피서와 금강산 유람 등 한량의 레저 생활, 씨름·백중놀이·소싸움·판놀이 등 온 나라가 즐긴 ‘국민 스포츠’까지 계절별로 엮었다.

피 터지게도 놀았다. 석전과 두레싸움이다. 석전은 ‘고려전’에 소개된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인데, 풀어 말하자면 돌팔매다. 서울에선 삼문 밖의 사람과 아현 사람이 만리고개에서 돌을 던지며 놀았다. “돌싸움이 시작되면 용산과 마포의 소년들까지 달려들어 함성이 천지를 울리고 이마가 깨지고 팔이 부러지는 등 난투극을 방불케 하였다.” 이는 20세기 전후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풍속으로 보였다. 놀다가 두개골이 깨져 뇌가 보이는 환자의 방문을 받은, 당시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호러스 알렌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두레싸움도 그 강도가 지지 않았다. 두레싸움은 벼농사에서 가장 힘들다는 김매기가 끝나는 때 벌어지는 호미씻기의 일종이다. 술과 안주를 대접받은 일꾼들이 인근 마을의 두레와 편싸움을 하는 것이다. 수로를 기준으로 양편을 나누고 둘의 농기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가름하는데, “서로 말싸움으로 옥신각신하다가 나중에는 몽둥이를 들고 서로 때리는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다. 장정의 조직인 두레 간 위세 싸움이므로 중상자가 생길지언정 물러서지 않고 끝장을 냈다.”

말싸움은 몽둥이 든 처절한 전투로

1933년 7월 충남 부여 중정리에서는 수십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는데, 농기에 대한 예식이 언쟁이 되어 ‘패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경찰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이런 두레 간 패싸움이 흔해서였다. 같은해 8월에도 대전에서는 100여 명의 두레싸움이 벌어져 수십 명의 중·경상자를 냈다. 이렇게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정적은 요란한 피와 땀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셈이다. 저자인 유승훈은 (살림 펴냄)를 펴낸 것으로 이미 놀기에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한 민속학자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