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베르토 에코의 저 즐거운 저작이 마니아 컬렉션으로 재출간되었다. 10년 전에 국내에 처음 나왔을 때 저 제목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그 촌철의 글들은 세관, 기내식, 공무원, TV 토크쇼 등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진짜 바보들에게 유머의 힘을 빌려 우아하게 화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애초에 나는 에코와 함께 이주일을 웃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책을 다시 펼치기 직전에, 딱 그 제목과도 같은 사건이 눈앞에 벌어졌다. 아시는 바와 같이 에 등장한 늘씬한 여대생이 ‘키 작은 남자는 루저(loser)다. 180cm는 돼야 한다’라는 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자폭도 이런 자폭이 있나?
나는 사상의 자유를 존중한다. 진짜 ‘리얼 월드’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품은 여성, 혹은 남성들을 적지 않게 만나왔다. 그들 세계에서는 통념에 가까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상파 TV 쇼에서 그런 발언을 하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변호사를 선임해놓거나, 해외에 은신처를 준비해놓거나, 전신 성형과 신분 세탁을 위한 세팅을 해놓거나. 그녀의 발언을 듣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 한마디였다. “이 바보야.”
자, 이 바보에게 우리는 어떻게 화를 내야 할까? 당연하게도 네티즌 수사대가 들고 일어났다. 국방부 통계를 끄집어내 성인 남성 중에서 ‘그녀의 루저’ 비율이 90%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절대다수의 힘을 믿고 그녀의 사생활을 캐기 시작했다. 이미 ‘제2의 개똥녀’ 우려가 현실로 드러날 만큼 맹공격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보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는, 똑같이 바보가 되는 방법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냥 씩씩대고 속으로 분을 삼킬 것인가? 천만에! 이럴 때 쓰라고 ‘유머’가 있다. 그 바보의 실언은 우리의 상상 중추를 자극해 주옥같은 유머를 쏟아내도록 했다. 그 수준과 가치를 비교해보는 게 내겐 흥미로운 일이다.
“오지헌 만나라. 그래 위너다”라는 즉자적인 반응은 평균점수 정도다. 키 작은 유명인 리스트를 올리며 히틀러와 무솔리니까지 언급한 경우는 실망스럽다. 게임 ‘역전 재판’을 패러디한 ‘역전 루저 재판’은 꽤 정성을 들이긴 했지만, 너무 일방적인 공격이라 상쾌함이 덜하다.
반대로 ‘톰크 루저’라며 단신 스타의 대명사를 등장시키며 말장난까지 버무린 네티즌은 순발력과 재치 면에서 최고점을 받을 만하다. 때마침 터진 교전 사건과 연결해, ‘김정일 루저가 열폭해서, 북한군 루저들이 서해로 내려온 것’이라는 해설은 고급스러운 리믹스 개그다. 이 사건이 세간의 지나친 관심을 끌며 여대생과 그 소속 학교에까지 마녀사냥을 벌이는 현상을 지적한 ‘신종 인플루저’라는 언급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
한때 신문 만평 작가들이 하던 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는 네티즌들이 놀랍다. ‘올해의 인터넷 유머상’이 있으면 후보들이 쟁쟁할 것 같다. 웃으면서 화내야 할 일이 참 많으니까.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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