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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포질 고비 넘기면 ‘극락’

아저씨 건프라 모델러
등록 2009-11-11 12:15 수정 2020-05-03 04:25
천강원씨가 2007년 완성한 건담 RX-93. 김송은

천강원씨가 2007년 완성한 건담 RX-93. 김송은

만화편집자 천강원(38)씨는 ‘아저씨 건프라 모델러’다. ‘건프라’란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나오는 로봇을 소재로 한 프라모델을 말한다. 지난여름 일본에선 방영 30주년을 기념해 18m에 달하는 실물 크기의 모형이 만들어지기도 했을 만큼 건담의 인기는 로봇 애니메이션 팬들에겐 절대적이다.

천강원씨가 건프라를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버지 직장 때문에 일본에 오래 살았던 천씨는 자연스레 건프라 열풍에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초·중·고 남학생이라면 건담의 매력에서 헤어나기 힘들었어요. 요즘 아가들이 에 미칠 수밖에 없듯이요.”

건프라를 좋아하는 사람의 유형은 다양하다. 단순하게 가조립만 하는 사람, 도색까지만 하는 사람, 만들지는 않고 사 모으기만 하는 사람, 본격적인 개조파…. 이 가운데 천씨는 개조파에 속한다. “프라모델을 만든다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만족입니다. 제가 건프라를 만들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해왔던 고유 메카닉의 이미지가 있는데, 그게 건담 설정집 자료와는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을 나름의 이미지로 개조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린 이미지대로 만들어졌을 때의 성취감은 자신이 기획한 도서가 대박쳤을 때보다 큽니다.”(사장님, 이 사람 보래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한두 달, 연속 작업한 기록은 10시간이다. 그동안엔 아무 잡념 없이 집중할 수 있어 행복하단다. 가끔 때려치울까 싶은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건 사포질을 할 때다. 자기수양에 가까운 가장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어서면 ‘매끈한 표면’이라는 극락이 펼쳐지죠.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몇 년 전, 옛 직장 동료였던 천강원씨의 집들이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건담이 떼로 진열돼 있는 걸 보고 왜 똑같은 걸 이렇게 많이 모았느냐고 묻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K씨와 G씨가 둘 다 여자니까 똑같이 생겼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당시 총각이던 그는 그동안 결혼을 했고, 지금은 둘째아들 출산을 앞둔 아빠가 되었다.

예전엔 빚을 져서라도 ‘득템’해야겠다는 생각에 비용을 쏟아부었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자연스레 아이템이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건프라 취미가 의외로 실생활에 도움이 많이 된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어른의 사치스런 취미”를 생활과 조화시키려 노력한다. 꼼꼼하게 자르고 칠하고 만들다 보니 손재주가 늘어 웬만한 자동차 정비 작업에 도색까지 혼자서 척척하게 되었고, 최근엔 싱크대 도색을 훌륭히 마쳐 부인의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두 아들이 크면 같은 취미를 갖게 한 다음, 아이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사포질을 시킬 생각이란다. “무한 사포질과 가조립 특훈을 시켜 제 조수로 삼아볼까 해요. 그리고 노인 모델러가 되는 게 최종적인 꿈이에요. 앞으로 25년쯤 남았으니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김송은 월간만화잡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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