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도 시대 따라 유행을 탄다. 피아노나 기타처럼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많은 이들이 배우는 클래식 악기가 있는 반면, 오카리나나 색소폰처럼 방송이나 영화를 보고 유행처럼 번지는 악기도 있다. 요즘 대세는 ‘젬베'다. “지금 무슨 악기 배우세요?”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젬베”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유행을 아는 사람이다. 아프리카 여행객이 해마다 늘어나는 등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음악으로 아프리카 문화를 접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젬베는 서아프리카 전통 타악기다. 린케·하리 같은 아프리카 나무를 통으로 잘라 속을 판 뒤 그 위에 염소 가죽을 씌운 타악기로, 깊은 울림을 내는 걸로 유명하다. 맨손으로 흥겹고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젬베는 아프리카에선 결혼식·성인식 같은 축제에서 주로 연주된다. 그래서 ‘기쁨의 악기’로 불린다.
전국 최대 악기상가인 서울 낙원상가는 요즘 때아닌 젬베 품절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곳에 있는 서울타악기의 한 점원은 “예년과 달리 젬베를 찾는 이가 많아졌다”며 “크기·용도별로 다양한 젬베를 구비해뒀지만 물건이 빨리 빠져 원하는 젬베를 구하려면 미리 전화를 하고 와야 헛걸음을 안 한다”고 말했다.
젬베를 연주하며 아프리카 리듬을 타는 사람들이 늘면서 젬베를 배우고 함께 연주해보는 ‘젬베 & 젬베폴라’(djembefola.kr), ‘쿰바야’(cafe.daum.net/akum) 등의 인터넷 카페와 오프라인 모임에도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세계적인 젬베 연주자 마마디 케이타가 인정한 젬베 마스터로, 젬베 & 젬베폴라를 운영하는 이영용(42)씨는 “2005년부터 사이트를 운영하며 오프라인 모임을 가져왔지만 요즘처럼 관심이 많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며 젬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반가워했다. 젬베 & 젬베폴라는 젬베와 아프리카 음악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강의’와 젬베의 잘못된 연주법을 고치고 젬베 튜닝법을 배우는 ‘클리닉’, 젬베를 함께 연주해보는 ‘젬베폴라’로 나눠 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있다. 모든 모임은 15평 남짓한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건물 지하 연습실에서 열린다.
클리닉이 진행된 지난 10월7일에도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연습실을 꽉 채웠다.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강의에는 20여 명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2005년 한두 명으로 시작한 오프라인 모임이 제법 커졌다. 이영용씨가 젬베에 대한 설명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젬베는 서아프리카의 각 국가마다 나무를 깎는 방식이 달라 겉을 보고 구분해낼 수 있어요. 통 위쪽 모양이 기니산은 직선으로, 말리산은 곡선으로 생겼어요. 젬베 하나를 만드는 덴 염소 한 마리의 가죽이 필요해요. 가죽을 만지면 털의 결을 느낄 수 있고, 둥글게 똑같아 보이지만 앞과 뒤도 따로 있죠.”
깊은 울림을 끌어내려면 12인치 이상의 크기에 8~9kg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젬베가 적당하다. 요즘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사이즈의 동남아산 젬베가 수입돼 들어오지만 이것으론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다.
젬베는 세 가지 소리를 정확하게 연주해야 한다. 가죽의 중앙을 치면 낮은 소리인 ‘베이스’, 손가락 전체로 가장자리를 치면 기본 소리인 ‘톤’이 난다. 손바닥 안쪽까지 이용해 젬베 가장자리를 칠 때 나는 좀더 얇은 소리는 ‘슬랩’이다. 젬베는 음역이 넒은 게 특징이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 음악뿐 아니라 재즈, 블루스 등 다양한 음악과도 잘 어울린다. 젬베는 솔로로 연주해도 웅장하고 힘있는 소리로 흥을 돋우지만 서로 다른 크기의 북인 ‘두눈바’ ‘상반’ ‘켄케니’를 함께 연주하면 제대로 된 아프리카 음악을 공연할 수 있다. 이씨는 “젬베의 세 가지 소리를 제대로 내는 것도 2~3년이 걸린다”며 “젬베는 악보를 눈으로 보고 연주하는 게 아니라 리듬을 귀로 듣고 하는 연주라 혼자서 연습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연주법을 모르면 젬베를 연주한다고 할 수 없다. 이영용씨가 제대로 된 연주법을 선보이며 솔리스트 연주를 보여줬다. 그의 손이 북에 닿는 듯 마는 듯 춤을 추며 내는 소리는 둥둥 울리며 깊고 넓은 리듬을 빠르게 쏟아냈다. 처음엔 큰 북소리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져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강렬한 리듬에 빠져 어깨까지 들썩여졌다. 이씨는 스승인 마마디 케이타의 말을 빌려 젬베를 연주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젬베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아프리카 음악을 연주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모독이다.”
이날 수업을 찾은 유아음악강사 장명숙(37)씨도 “음악을 전공한 터라 젬베도 다른 타악기처럼 쉽다고 생각했는데 만만치 않더라”고 말을 꺼냈다. 피아노를 전공했다는 그는 “처음에 젬베를 칠 때 손바닥이 아팠지만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젬베의 매력은 “자유롭게 리듬을 태워 감정 표현을 할 수 있고 리듬 합주를 할 때 흥이 배가 된다는 점”이다. 장씨를 따라 처음 젬베 클리닉을 찾은 딸 예나(11)도 “집에서 젬베를 연주해봤는데 재밌었다”며 “동생 예찬(4)이는 아프리카 음악 연주 동영상을 틀어주면 즐겁게 춤까지 춤다”고 말했다.
수업 참가자들은 젬베를 연주하는 기분을 자유·해방감·기쁨으로 표현했다. 2000년부터 젬베를 연주하고 있다는 건설엔지니어 ‘소리’(47)씨도 “젬베의 베이스 소리는 심장박동 소리처럼 따뜻하다”며 “사는 게 힘겨운 아프리카 사람들이 춤과 노래를 잃지 않는 건 음악이 주는 힘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음악에 대한 관심은 곧 그 나라 역사와 문화로 옮아갔다. 클리닉에 참여하기 위해 광주에서 올라온 송무준(34)씨의 직업은 원불교 교무다. 정적인 일을 하는 그에게 아프리카 음악은 눌린 감정을 발산하는 데 도움이 됐다. 사물놀이를 해서 타악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젬베를 연주할 때면 일상에 찌들었던 내가 순수한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정화된 느낌을 갖게 된다”고 했다. 아프리카 음악의 매력에 흠뻑 취한 그는 “얼마 전부터 원불교 내 아프리카를 돕는 후원회에 후원금을 내기 시작했다”며 “서아프리카 여행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정신지체아들을 가르치는 특수학교 선생님인 ‘베리’(26)씨는 젬베를 배우다 아프리카 춤과도 사랑에 빠졌다. 젬베 연주그룹인 바라칸의 단원이기도 한 그는 이영용씨의 젬베 연주에 맞춰 몸을 흐느적거리기도 하고,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춤을 췄다. 그는 “아프리카 음악이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올해 3월부터 특수활동 시간에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고 했다. 낯설게만 느껴지던 검은 대륙의 음악이 치유의 음악으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근 들어 방송에도 소개됐지만 대중화까지는 먼 길젬베와 아프리카 음악에 대한 관심이 이처럼 커진 건 무엇보다 방송의 힘이 컸다. 최근 케이블 채널 엠넷의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인 에 출연했던 조문근씨가 젬베를 연주하면서 관심을 끌었다. 젬베는 그가 부른 조용필의 , 아바의 , 윤도현 밴드의 등 어떤 장르의 음악도 멋지게 소화했다. 조씨는 “길거리 공연 때마다 연주했던 젬베가 이번 도전에서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젬베는 한국방송 에도 등장했다. 글로벌 특집편에 출연했던 아프리카 음악가 와프가 흥겨운 연주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던 것.
대학생인 김수지(23)씨도 방송을 통해 젬베를 처음 접했다. 때마침 학교 선배가 직접 젬베를 연주하는 모습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까지 보고 나니 젬베를 배우고 싶은 열망을 누를 수 없었다. 낙원상가로 달려가 악기부터 구입했다는 그는 “인터넷에 올라온 각종 아프리카 음악 연주 동영상을 보며 연주법을 익히다, 혼자서는 힘들어 오프라인 모임까지 찾아왔다”고 말했다.
여행과 방송을 통해 젬베와 아프리카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대중화의 길은 아직 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서울 홍익대 앞 놀이터 한켠에서 들을 수 있었던 젬베 연주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젬베 소리가 시끄럽다는 주민들의 불만으로 거리 공연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바라칸’ ‘쿰바야’ ‘두두리카’ 등 소규모 젬베 연주그룹들이 각종 민속축제 등에 초청돼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연주를 상시 들을 수 있는 클럽 등의 무대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이영용씨는 “젬베의 대중화를 위해 젬베 음악이 활성화된 일본이나 대만 같은 아시아 국가 젬베 연주자들과 함께 여는 축제를 기획 중”이라며 “언어와 인종을 뛰어넘어 기쁨과 평화를 표현하는 젬베와 아프리카 음악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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