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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 귀찮은 여름, 면식 수행

등록 2009-08-21 18:09 수정 2020-05-03 04:25

수은주가 40도를 향해 날뛰거나, 장대비가 300㎜씩 퍼붓거나… 아무튼 우리를 지치게 하는 여름날이다. 남들은 휴가다 뭐다 달아나도, 방구석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겐 꼼지락도 부담스러운 나날이다. 입도 심심하고, 배도 고프고, 머리도 멍멍하고… 이런 금요일 저녁 나를 찾아온 한 프로그램이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스펀지 2.0>의 ‘별난 면 요리’

<스펀지 2.0>의 ‘별난 면 요리’

주인공은 의 ‘별난 면 요리’ 소개였다. 오랜만에 본 는 솔직히 예전만큼의 왁자지껄한 활력은 없었다. 그러나 웬만한 개그 프로그램 못지않게 세련된 웃음을 전하는 솜씨는 여전했다. 한마디로 면발이 살아 있는 코믹 버라이어티라고나 할까.

입맛 없어 멍해진 내 머리를 찰싹하고 때린 것은 수타면보다 쫄깃하다는 족타면. 프로그램은 경주에 있다는 특이한 요리를 소개하는데, 발로 때리는 면이라는 정체도 재미있지만 그 안내의 방식이 아주 배꼽 잡는다. 앞에서는 진지하게 요리 비법을 개발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는데, 뒤에서는 천연덕스럽게 마주 서서 면을 꾹꾹 밟으며 돌고 있는 아주머니들. 어쩐지 코믹 리포터가 침을 튀기며 오버하면서 요리를 소개해야 할 것 같은 순간에, 과장된 엄숙함이 주는 그 아이러니가 더 큰 웃음을 준다.

이런 방식은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개그 코드인 것 같다. 인터넷에 한동안 유행했던 이색 라면 요리를 보여주는 것은 좀 식상하다 싶었는데, 그걸 보여주는 방식이 제법 기발하다. 사이다에 설탕을 넣은 이색 비빔면과 같은, 한마디로 저렴한 창작 요리를 일류 요리사에게 맡겨 조리한다. 그리고 마치 만화 의 한 장면처럼 요식업 전문가에게 시식을 부탁하는데, 그들 사이의 터무니없이 진지한 태도가 배꼽을 잡는다. 대화도 “맛이 없는데요” “괜찮은 것 같은데요” 같은 극히 단순한 표현들로 일관하는데, 이 얼마나 훌륭한 미니멀리즘 개그인가? 그야말로 담백한 면발과 심심하다 싶은 국물만으로 손님의 입맛을 잡는 국숫집의 솜씨 같다.

한때 는 교양 프로그램은 진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고, 마치 코믹 버라이어티쇼와 같은 형태로 다채로운 지식을 웃음에 버무려 건네주었다. 검은 쫄쫄이 옷을 입고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는 ‘실험맨’은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코믹 캐릭터가 되었다. 이후 이러한 스타일의 ‘반 교양 반 연예’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났다. 그리고 점차 교양은 사라지고 연예인들의 내용 없는 말장난 개그만 남발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지금의 가 왕년의 모습처럼 활기와 지식으로 펄떡거리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가끔은 이렇게 담백하고 세련된 웃음을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사실이 반갑다. 그리고 방송 현장의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면식 수행’의 나날을 보내며, 를 넘어선 웃음과 교양의 하모니를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을 것 같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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