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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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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장비, 배고픈 ‘록 스피릿’

좋은 악기에 대한 욕심에 무리하며 신용카드를 그었으나,
악기가 좋다고 음악을 잘하는 건 아니라오
등록 2009-08-13 16:15 수정 2020-05-03 04:25
사람의 입 모양을 따라 소리를 내주는 토크박스는 누구라도 탐낼 만한 이펙터였지만, 본 조비의 곡을 연주하겠다는 이유만으로 수십만원씩 하는 토크박스를 사는 건 고등학생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록그룹 본 조비의 리치 샘보라가 토크박스에 연결된 호스를 입에 물고 기타를 치는 모습.

사람의 입 모양을 따라 소리를 내주는 토크박스는 누구라도 탐낼 만한 이펙터였지만, 본 조비의 곡을 연주하겠다는 이유만으로 수십만원씩 하는 토크박스를 사는 건 고등학생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록그룹 본 조비의 리치 샘보라가 토크박스에 연결된 호스를 입에 물고 기타를 치는 모습.

얼마 전 친구가 하는 직장인 밴드의 합주 구경을 갔다가 연습실을 같이 쓰는 스쿨밴드의 고등학생 몇 명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영 안 어울리는 이들의 헤어스타일을 보니, 로커처럼 보이려고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억지로 기르던 예전 기억이 떠올라 반갑기도 했는데, 놀라웠던 건 이 친구들이 갖고 있던 고가의 악기들이었다. 한 대에 200만원이 넘는 미제 깁슨 기타를 메고 있던 친구에게 부모님이 사준 거냐고 물었더니 “아뇨, 1년쯤 죽자고 모아서 샀어요. 주유소 아르바이트도 하고, 문제집값에 학원비도 합쳐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 정말이지 그 열정만은 높이 산다. 니들 꼭 성공해라.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연주하는 걸 보니 기타가 좀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은 악기(당연히 비싸다)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 메이플(단풍나무) 원목으로 만든 기타는 톱밥을 목공용 본드로 짓이겨 만든 싸구려 기타와 소리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 이게 있으면 음악도 훨씬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졸라 마련한 합판 기타(톱밥보다는 좋은 거다)를 밑천으로 삼아, 쓰던 기타를 판 돈에 얼마씩 보태 좀더 비싼 기타를 사는 방법으로 조금씩 장비를 업그레이드했다. 대학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애시(물푸레나무)로 만든 펜더 기타와 건반을 마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노래를 만들어 녹음하자니 마이크와 믹서 같은 레코딩 장비도 필요했다. 장비 살 돈을 모으다 정작 음악은 못할 것 같아 급한 대로 수십 만 대학생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신용카드의 힘을 빌렸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어느 정도 음악을 만들고 녹음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도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개점 휴업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좋은 악기가 음악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어도 악기가 좋다고 음악을 잘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어떤 음악이냐에 따라 좀 달라질 수 있는 문제긴 하다). 외국 뮤지션들 중에는 요샌 아무도 안 쓰는 1980년대 구닥다리 전자악기를 신주 모시듯 하면서 혁신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게다가 요즘은 기술이 워낙 발전해서 노하우만 있으면 컴퓨터 한 대와 약간의 장비로도 웬만한 음반 못지않은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인디 뮤지션들이 그렇게 작업을 한다. 몇 해 전 결혼식 축가를 부르는 일 때문에 한동안 같이 연습을 했던 어느 무명 밴드도 싸구려 노래방 마이크 몇 개와 컴퓨터 한 대로 6곡이 담긴 음반을 만들어 데뷔했다. 이 음반에 담긴 라는 제목의 러브송은 ‘인디계의 ’라는 평가를 받았고,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는 요즘 인디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요즘이야 이런저런 악기도 사고 그랬다던데, 어쨌든 후진 악기로도 좋은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뮤지션들은 예전에도 많았고 지금도 넘쳐난다.

문득 고등학교 때 우리와 경쟁 관계(?)에 있던 밴드에서 기타를 치던 한 학년 위 선배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학교 육성회장을 할 정도로 집이 부자였던 그는 고등학생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악기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기타는 말할 것도 없고 ‘본 조비’의 음악을 연주하겠다는 이유만으로 ‘토크박스’라는 비싼 이펙터(소리를 변환시켜 다양한 효과를 내는 기계)를 따로 살 정도였다(본 조비의 노래들을 들어보면 ‘워우워우’ 하는 식의 요상한 기타 소리가 나는데, 토크박스에 연결된 호스를 입에 물고 기타를 치면 기타 소리가 입 모양의 변화에 따라, 마치 말하는 것처럼 나온다). 대학에 가서는 집에서 아예 스튜디오를 차려줬다는 소문도 있고. H형, 다 지난 일이니까 하는 얘긴데, 사실 우리 그때 뒤에서 형 험담 많이 했어요. 배가 불러 ‘록 스피릿’이 부족하다고요. 그나저나 요샌 뭐하고 지내시나요?

정민영 기자 한겨레 사회교육팀 min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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