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퇴근하던 길에 어느 건물 지하에 있는 녹음 스튜디오가 눈에 띄어 구경할 겸 무작정 들어가봤다.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스튜디오였는데, 엔지니어 아저씨는 이만한 가격에 이 정도 시설 찾기 쉽지 않다며 더 싸게 해줄 테니 여기서 녹음을 하라고 꼬드겼다. 이 스튜디오에서 녹음해서 대박 난 가수들도 많다고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누가 그렇게 대박이 났는데요?”
“핑클이오. 근데 제작하시는 분이세요? 아니면 매니저?”
젠장. 아저씨, 나도 데뷔한 뮤지션이거든요, 라는 말이 입에서 뱅뱅 돌았지만 무슨 음반이냐고 물어볼까봐 차마 말은 못했다.
첫 녹음의 기회는 밤손님처럼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공연을 잠시 쉬고 있던 어느 가을날 클럽 사장님이 전화를 걸어와 “너희들 노래 괜찮은데 음반 만들어볼래?”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독집 음반도 아니고 컴필레이션(여러 밴드의 노래를 몇 곡씩 모으는) 음반이긴 했지만, 나는 이것이 인생에 세 번쯤 온다는 기회 중 한 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 어떤 고민도 없이 러브콜을 받아들였다.
일단 하기로는 했지만 사실 그땐 녹음을 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 ‘토마토’ 멤버들이 군입대다 뭐다 해서 모두 밴드를 나갔을 때라, 멤버는 나 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녹음 전까지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를 구해야 했다. 건너건너 아는 친구들까지 수소문한 끝에 드러머를 구했고, 2001년 겨울 드디어 녹음이 시작됐다. 사장님은 경기 벽제에 있는 으리으리한 녹음실을 빌려 밤마다 승합차로 우릴 실어날랐고, 매일 삼겹살도 먹여줬다. 새벽녘 허기와 피로를 달랠 컵라면과 담배까지.
우리 노래들은 연주 자체가 단순하고 편곡도 간결해서 악기 녹음은 생각보다 쉽게 진행됐다. 몇 해 전 ‘소스박스’에서 함께 활동했던 드러머 L은 특유의 정교한 드러밍으로 금세 두 곡의 녹음을 끝내버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그때는 고기 한 번 사주는 조건으로 녹음을 도와줬지만, L은 이제 비싼 세션료 없이 모시기 힘든 드러머가 되었다). 내 기타 연주 실력이야 단기간에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거였고.
문제는 노래였다. 안 그래도 못하는 노래를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려니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도 쉽지 않았다. 어쨌든 욕도 많이 먹으면서 코러스까지 녹음이 끝났다. 녹음을 해놓고 보니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들려서 만족스러웠고, 녹음이 다 끝나고 난 뒤 사장님은 기뻐하며 통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 믹싱을 비롯한 후반 작업까지 순조롭게 마무리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반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처음 음반이 나왔을 때의 흥분과 떨림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언제쯤이면 이 음반에 담긴 내 노래들이 서울 전역을 뒤흔들 것인가 하는 기대에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불특정 다수와 내 음악을 함께 듣고 싶은 절절한 마음에 몇 번은 강남역 한복판에서 최신가요 CD와 테이프를 파는 아저씨에게 내 CD를 건네주며 “아저씨, 이 노래 두 곡 여기서 한 번씩만 틀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물론 그때마다 나는 최신가요 CD를 사야 했다). 지나다니다가 음반 매장에 들어가 내 돈 주고 내 음반을 산 적도 몇 번 있었고.
하지만… 음반 발매 기념공연 뒤로 사장님을 볼 수는 없었다. 인세 같은 걸 바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음반이 얼마나 팔렸는지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신해철 아저씨가 자기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내 노래를 몇 번 틀어줬고 발매 기념공연이 케이블 TV로도 여러 번 재방송됐지만, 그냥 그게 다였다. 록페스티벌에 초청된다든지 공중파 출연 요청이 쇄도하는 따위의 일은 결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뭐, 아직 기회가 두 번 정도 남아 있다는 믿음을 난 버리지 않고 있다. 파마머리 P사장님, 요즘은 어디서 무얼 하시나요. 그때 저한테 잘해보자고 그러셨잖아요. 이거 보면 연락 한번 주세요. 뭐 음반 내달라는 건 아니고요.
정민영 기자 한겨레 사회교육팀 min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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