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를 처음 산 건 1994년 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록스타가 되겠다는 뜨거운 꿈을 안고 서울 종로 낙원상가에 기타를 사러간 그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악기점 아저씨는 뭉툭한 손으로 같은 트로트 몇 곡을 연주해 보였다. 그러면서 내게 “나도 옛날에 그랬는데, 기타 잘 치면 학교에서 여학생들이 엄청 좋아한다. 열심히 쳐라”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의 기타 실력은 지금 생각해도 꽤 훌륭했지만, 그 아저씨를 봐선 기타를 잘 친다고 인기가 많아질 거라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해 경주로 떠난 수학여행에서 나는 무대에 올라 기타를 잡았지만, 여학생들의 시선은 오직 잘생긴 보컬 녀석에게 집중됐고, 나는 그 흔한 쪽지 하나 받아보지 못했다.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기타 잘 쳐도 별거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우울한 마음으로 잠들었던 민망한 기억이 생생하다. 로커로서의 시작, 첫 단추부터 뭔가 잘못 끼워진 느낌이었다.
음악을 한다고 하면 주변에서 ‘연애하는 데 좋겠다’ ‘음악으로 꼬이면 잘 넘어올 거 아니냐’ 따위의 얘길 종종 듣는다. 글쎄 그런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연애가 시작되기 전 단계, 그러니까 마음을 고백하기 전에 그녀를 앞에 두고 기타를 치며 한 곡조 뽑거나 노래를 만들어 바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어차피 될 일은 될 거고, 통기타가 아니라 60인조 오케스트라를 동원해도 안 될 일을 되게 하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데 어쭙잖은 재주를 동원하는 게 그땐 왠지 구차하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일단 연애가 시작되고 나면, 나는 그녀들에게 부지런히 노래를 만들어 들려줬다. 시각적으로 만족이 안 된다면 청각적으로라도 기쁨을 줘야 할 것 아닌가.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들은 대체로 늦은 밤 전화를 타고 울린 뮤직쇼에 그런대로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렇다. 음악, 연애하는 데 꽤 도움이 된다. 물론 상대방이 별 생각이 없는 상태라면 성시경 같은 목소리로 세레나데를 부른대도 안 될 일이지만,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화학반응이 시작된 뒤라면 말이다. 소피 마르소가 나왔던 영화 의 낭만적인 장면을 떠올려보자. 시끄러운 댄스파티에서 소년 마티유는 열세 살 소녀 빅(소피 마르소)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는데 이때 리처드 샌더슨의 감미로운 음악 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에 둘만 남은 듯 아름다운 춤을 춘다. 연애에서 음악으로 어필한다는 건 그런 거다. 둘만이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주는 것. 게다가 남성과는 다르게 여성은 목소리 톤이 좋다는 것이 호감의 이유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청각이 예민한 종족이 아닌가. 그러니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든 곡을 연주해주거나, 전화로 나직이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이 특별한 느낌으로 전해지는 것이려니 하는 생각이 든다. 주위에 물어보니, 여자친구를 위해 여섯 곡이 담긴 음반을 직접 만들어준 일이 있다는 뮤지션도 있다. 그의 여성팬들이 실망할 수도 있으니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딱히 없고 노래 실력이 변변찮아도 괜찮다. 오히려 용기 있는 결단에 그녀는, 그는 더욱 기특하고 소중한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회사 선배는 내 얘기에 ‘노래 실력이 형편없던 첫사랑’을 떠올렸다. 세상에 그런 음치를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노래 실력에도 자기를 위해 이문세 노래를 불러주던 그가 그렇게 기특하고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이문세 노래를 만든 작곡가 이영훈이 세상을 떠났을 때 첫사랑 그를 떠올리며 일기까지 썼다고 한다.) 설령 그녀나 그가 음악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어도, 결국 음악은 당신의 진심을 전달할 것이다. 오늘밤에는 용기를 내 그들에게 노래 한 곡 불러줘보자. 그리고 아직 시간이 많은 소년·소녀들아. 너희는 기타를 잡아라. 늦기 전에.
정민영 기자 한겨레 사회교육팀 min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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