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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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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가 아프다

밴드를 전전하다가 기자가 된 남자의 고백, 사실 친구가 뮤지션으로 뜰 때면…
등록 2009-04-01 17:26 수정 2020-05-03 04:25

#1. 1996년 겨울, 기타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난생처음으로 무대에서 공연이란 걸 했다. 고교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던(?) 사내녀석들이 만든 ‘슬랩대쉬’라는 다소 우스꽝스런 이름의 이 밴드는 학교 강당에 모인 고딩 200여 명을 앞에 두고 그야말로 화려한 데뷔전을 치른다. 앙코르곡이었던 너바나의 노래 (Smells Like Teen Spirit)은 지금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1996년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필자가 활동하던 밴드 ‘슬랩대쉬’의 공연 모습. 맨 왼쪽에서 베이스 기타에 심취한 이가 필자.

1996년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필자가 활동하던 밴드 ‘슬랩대쉬’의 공연 모습. 맨 왼쪽에서 베이스 기타에 심취한 이가 필자.

#2. ‘소스박스’(SauceBox), ‘트리니티’(Trinity) 등 지금 보면 좀 민망한 이름을 가진 밴드 이곳저곳을 거치다가 2001년 여름 ‘토마토’라는 밴드를 결성해 성공적으로 홍대 인디신에 진출한다. 인기는 별로 없었지만 “연주는 엉성해도 노래는 괜찮다”는 만족할 만한 평가를 받기도 했고, 두 곡 정도가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하지만 게으른데다 성격이 제멋대로이기까지 한 리더 때문이었는지 멤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뿔뿔이 흩어졌고 토마토는 안타까운 해체를 맞게 된다.

#3. ‘더 이상 시간을 늦출 수 없다’는 다급함에 2005년에는 토마토를 뛰쳐나간 친구와 다시 밴드를 만들어 홍대로 진출한다. 좀처럼 말이 없던 클럽 사장님은 “뭐 그래도 곡은 괜찮네”라는 희망적인 격려로 용기를 북돋아줬지만 어렵게 모은 멤버들이 “별로 비전이 없다”며 또다시 제 살길을 찾아나서면서 야심차게 출발한 밴드 ‘데이지데일’의 활동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그때 나간 멤버 한 명은 얼마 전 증권회사 영업맨이 되었는데 날마다 직장 상사에게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따위에 대한 자질구레한 간섭을 받으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돌이켜보면 음악에 관한 한 나는 늘 초조해했다. 열일곱 즈음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김현철 1집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허무맹랑하지만 꽤 구체적인 다짐을 한 뒤로, 감수성이 무뎌지기 전에 썩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20대 내내 시달렸다. 결국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노래 몇 곡을 만들었을 뿐이지만, 아직도 나는 이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음악을 취미 수준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이제 음악은 취미로 하는 게 어떠냐”는 아버지의 충고가 모욕적으로 들리고, 괜찮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뮤지션들에게 질투심이 먼저 드는 걸 보면 분명 그렇다. 게다가 기타를 메고 다니면서 알게 된 친구들이 별안간 대중음악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요즈음 들어서는 안 아프던 배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두고 로커의 길을 선택할 용기, 내게는 없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설령 록스타가 된다고 해도 내 삶이 필연적으로 행복해질 거란 생각도 안 한다. 꿈은 그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꿈인 것이고, 꿈이 이뤄지면 행복할 것이라는 것도 일종의 환상일지 모른다. 그저 쓰린 마음으로 퇴근하고 집에 와 기타를 만지작거리다 잠이 드는 지금이 그나마 가장 행복한 상태인지도 모르겠고.

그럼에도 나는 적어도 마음으로는, 음악을 그저 하나의 취미로 생각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나에게, 또 밤마다 기타를 끌어안고 잠들던 수많은 록키드들에게 음악은 한때나마 ‘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구절절한 넋두리를 늘어놓는 이유는 앞으로 연재할 칼럼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음악 칼럼이긴 하지만 음반이나 뮤지션에 대해 평론가들이 쓰는 글을 흉내내고 싶지는 않고, 그럴 능력도 없다. 음악과 아무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차마 미련을 못 버리고 사는 사람의 소소한 음악 얘기를 해볼 작정이다.

아침 일찍 출근한 증권회사 영업맨 친구에게 메신저로 “록스타가 될 수 있다면 회사 그만둘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굳이 록스타가 못 돼도 이 회사는 그만두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안 그래도 일자리 없다고 난린데, 그만두지 말고 꼭 달라붙어 있어라. 회사 그만두지 않고 록스타가 될 수 있는 길, 나랑 같이 한번 찾아보자.

정민영 기자 한겨레 사회교육팀 minyoung@hani.co.kr

*음악과 마감 사이에 서 있는 정민영 기자의 ‘마음은 언제나 록스타’는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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