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서울 낙원동 악기 전문점에서 기타를 고르는 손님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가 건물 중 하나인 서울 종로의 낙원상가. 200여 곳의 악기 매장이 한데 모인 이곳에서 사지 못할 악기는 없다고 봐도 좋다. 온갖 전자악기와 음향장비는 물론이고 바이올린과 첼로 같은 클래식 악기에 초등학교 때 쓰던 멜로디언과 캐스터네츠까지. 2층 상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배고픈 로커들의 서글픈 전자기타 소리가 귀에 와 감기는 이곳은 록스타를 꿈꾸던 고딩들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놀이터였다.
기타 실력으로는 한가락씩 한다는 재야의 고수들이 이곳저곳에 한 군데씩 자리를 잡고 울부짖는 듯한 기타 연주 경연을 벌이기도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밝은 갈색 선글라스를 끼고 중후한 표정으로 색소폰을 부는 반백의 아저씨를 볼 수도 있었다. 운이 좋다면 넥스트의 김세황 같은 ‘빅리그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눈앞에서 볼 수도 있었고(그는 내 싸구려 합판 기타에 사인을 해주더니 기타 연주를 보여달라는 요청에 흔쾌히 (Here I stand for you)의 현란한 솔로를 보여주기도 했다). 요즘이야 컴퓨터로 음악을 많이 하는데다 외국에 직접 악기를 주문할 수도 있다 보니 전처럼 낙원상가에 갈 일이 많지 않지만, 드럼 세트만 봐도 심장이 뛰던 고교 시절의 나는 일요일마다 경기도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종로3가를 찾곤 했다.
일단 음악 잡지에서나 보던 거의 모든 악기들을 이곳에 가면 볼 수 있었다. 건스앤로지스의 슬래시가 치던 깁슨 레스폴 기타와 비틀스 폴 매카트니의 리켄배커 베이스 기타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매장 점원이 까탈스럽다면 눈치를 좀 봐야 했지만, 가끔은 이놈들을 직접 연주해보는 영광을 누릴 수도 있었다(명품 가방 ‘버킨백’을 사려고 온갖 난리를 치던 드라마 의 주인공 사만다의 마음도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악기 구경도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지만,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고 낙원상가 악기 매장에서 일하는 형님들은 더없이 좋은 음악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때야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기도 어려웠고 부모님께 음악학원에 보내달라고 할 처지도 못 됐기 때문에, 웬만한 문제는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야 했다. 이럴 때마다 낙원상가를 돌아다니며 슬쩍슬쩍 물어보면서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들이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 기타 소리를 두껍게 만들려면 기타 앰프의 세팅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스위프 피킹(오른손이 빗자루질을 하는 것처럼 기타 6줄을 쓸어내림과 동시에 왼손은 각 줄을 옮겨가며 하나의 음을 독립적으로 연주하는 주법)은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 낙원상가의 고수들은 손수 시범을 보여주며 노하우를 전수해주곤 했다. 물론 아무것도 안 사면서 물어보기만 할 수는 없으니, 2천원짜리 기타줄 한 세트라도 사긴 해야 했다(어떤 날은 기타줄 세트만 대여섯 개 사들고 집에 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40년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록키드’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해온 낙원상가의 미래는 어둡다. 이곳이 남대문시장, 동대문운동장 등과 함께 서울 강북의 도심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돼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당장 여길 재개발하지는 않기로 했다지만, 이곳에서 수십 년 동안 ‘악기밥’을 먹어온 사람들은 일터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기만 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드나든 단골 악기 매장 아줌마는 “그동안 이걸로 먹고살았으니 됐지. 이제 다른 거 준비해야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이 아줌마한테 바가지도 많이 썼지만 그의 담담함에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시장님, 깔끔하고 쾌적한 도시도 좋지만 여긴 그냥 좀 내버려두시면 안 될까요? 바이올린 가게도, 기타 수리점도, 악기 전당포도….
정민영 기자 한겨레 사회정책팀 min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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