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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 옆의 불타는 아이

존 쿳시 <철의 시대>가 묻는 질문, 편안한 잠을 버리고 범죄 현장으로 간 한 늙은 여자의 고통
등록 2009-02-13 14:30 수정 2020-05-03 04:25
“아버지, 제가 불에 타는 것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아이가 아버지의 침대 곁에서 이렇게 애원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잠에 빠져 꿈을 꾸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존 쿳시 <철의 시대>

존 쿳시 <철의 시대>

함께 책을 읽는 우리 모임의 한 분이 프로이트의 에서 인용되었다는 이 구절을 짚어주기 전까지, 나는 이 문장을 읽은 기억조차 떠올리지 못했다(함께 책 읽는 것의 고마움이여). 흑인 아이를 돕기 위해 흑인 거주 지역으로 갔다가 불타는 마을과 살해당한 아이들만 보고 황급히 집으로 도망쳐온 엘리자베스 커런이 다음날 횡설수설 늘어놓는 자책 속에 이 구절은 다소 생뚱맞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삽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번 이 구절이 눈에 박히자, 불타는 아이, 잠에 빠져 꿈꾸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왕은철 옮김, 들녘 펴냄) 전체에 드리워졌다. 정작 이 책은 고통으로 잠들지 못하는 어머니, 병든 늙은 여자의 이야기인데 말이다.

노벨문학상과 부커상을 받기도 한 쿳시는 어찌해도 정치적 독해를 피해갈 수 없는 그런 작가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출신이고 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이며 영어로 교육을 받아 영어로 글을 쓰는 지식인이라는 그의 태생적 배경 탓에 설사 뉴요커들이 브런치를 먹으며 연애하는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정치적 우화로 읽힐 판국인데, 쿳시의 작품에는 남아프리카의 인종 문제와 사회적 갈등이 삶의 기본 조건(그저 양심 있는 지식인이 관심을 기울이기로 ‘선택’하는 여러 사회문제들 중 하나가 아니라)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커런은 한때 남아프리카 대학에서 ‘서구의 고전문학을 가르치던 백인 지식인’이었지만, 이제는 성별도, 직업도, 인종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만인 공통의 한 가지 신분, 즉 ‘늙은이’다. 불치의 암 선고를 받아 하루하루 약에 의존하며 사는 그녀에게 남은 것은 사람이 밀어줘야 시동이 걸리는 고물차와 허물어져가는 집,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미국으로 떠나버린 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전부다. 젊음도 없고, 자신의 몸을 지탱할 최소한의 힘도 없고, 온기를 나눠줄 개 한 마리 없는, 그래서 우연히 차고에서 만난 흑인 부랑자에게 자신의 죽어가는 몸을 의탁해야만 하는 늙은 여자. 흑인 마을이 몽땅 불타버리고 아이들이 총에 맞아 죽는다 한들 누가 이런 여자에게 그 죄를 묻겠는가?

그런데 이 병든 늙은 여자가 사랑하는 흑인 아이 한 명을 찾기 위해 자정이 넘은 한밤중에 배터리도 고장난 차를 몰고 불타는 흑인 마을로 달려간다. 그리고 땅에 누인 죽은 아이들의 주검과 거기서 자행되는 모든 폭력을 ‘충분히’ 본 뒤에, 애처롭게 말한다. “이젠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나의 안전한 집으로, 어렸을 때 자던 침대로 가겠다는 칭얼거림.’ 바로 이 지점에서 늙은 여자는 비난을 받는다. 눈앞에서 범죄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본 사람에게는 ‘충분히 봤다. 이젠 집에 가고 싶다’란 말이 아닌 다른 말을 해야 할 절대적 의무가 지워지기 때문에. 만약 그녀가 고물차를 몰고 한밤중에 길을 나서는 대신, 병든 몸을 침대에 누이고 잠에 빠져 있었더라면? 그녀는 꿈을 꾸느라 마을이 불타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며 거기에 대해 비난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참여’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범죄가 내 눈앞에서 벌어졌고, 그 순간 나는 거기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도록 선택받는다.

옮긴이는 해설에서 ‘암에 걸린 백인 여성의 몸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보면 똑같이 암에 걸린 남아프리카 백인 정권에 대한 메타포’라고 말한다. 지극히 모범적인 해석이다. 쿳시의 작품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타당하고, 정치적 해석으로 보면 ‘암에 걸린 백인 여성의 몸’은 ‘암에 걸린 백인 정권에 대한 메타포’로 읽히는 것이 정답이다. 그러나 커런의 암은 ‘평생 참아왔던 수치심이 누적’된 결과인 반면, 백인 정권의 암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냉담함과 외면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또한 커런의 몸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인 생명을 낳은 반면, 백인 정권은 숱한 죽음을 낳지 않았는가.

“아버지, 제가 불에 타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아이는 바로 아버지의 침대 곁에서 애원하지만, 아버지는 잠에 빠져 꿈을 꾸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오직 수치심의 고통에 시달리는 늙은 어머니만이 한밤중에도 깨어 그 불타는 모습을 보고 비난받아야 할 무리에 동참하는 것이다.

최인자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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