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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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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사유하는 클리닉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인문의학-고통! 사람과 세상을 만나다>,
고통에 대한 사유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등록 2009-02-11 15:10 수정 2020-05-03 04:25

연쇄살인, 고통스럽다. 7명의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피의자가 ‘고통을 즐겼다’ 하니 더욱 그러하다. 언론은 검거 보도 직후부터 그를 ‘사이코패스’로 앞다퉈 규정해버렸다. 유영철·정남규 등 2년이 멀다하고 참혹한 범죄가 반복된다. 그러니 물어야겠다. 한국 사회는 고통을 사유하는가, 소비하는가. 30년 전 이성복 시인은 말했다.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 망각은 삶의 죽음이고, 아픔은 죽음의 삶이다.” 살갗을 태울 듯한 고통조차 금세 식어버린 패스트푸드가 된다면 어쩌나. 고통의 되먹임을 막기 위해서라도 고통을 생각해야 한다. 바야흐로 사유가 필요하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실어나른 것 같은 ‘파국’을 막으려면 공통감의 회복이 절실하다. 공통감의 근간은 고통이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실어나른 것 같은 ‘파국’을 막으려면 공통감의 회복이 절실하다. 공통감의 근간은 고통이다.

문장 틈으로 스미는 연쇄살인, 시절인연

(휴머니스트 펴냄)는 소외된 고통이라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풀기 위해 의학과 인문학을 통합적으로 사유하려 기획된 책이다. 2007년 문을 연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가 펴낸 두 번째 성과다. 지난해 첫 책 에선 건강을 에워싸고 있는 통념에 딴죽을 걸고 그것의 역사·문화적 맥락을 두루 짚어낸 바 있다. 미리 명토 박건대, 새로운 이론이나 충격적인 주장이 실린 글은 없다. 불안과 마찬가지로 고통 역시 천지개벽 부를 사유는 쉽지 않다. 오히려 이 책의 가치는 그러한 진부함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의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책에 실린 18꼭지 가운데 앞부분 4꼭지는 질병이 일으키는 고통과 병원 현실에 대한 성찰이다. 의사 앞에서 자신이 보릿자루처럼 느껴졌던 이들이라면 꼭 읽을 일이다. 환자의 인간성이 의사의 시선과 태도에서 괄호 안으로 쫓겨나는 원인과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무엇보다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는 글은 ‘고통의 현상과 윤리적 삶’(공병혜)이다. 시절인연이다. 연쇄살인 사건이 문장들 틈으로 끊임없이 스미는 탓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1963)에서 분석한바, 아이히만은 야수나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아버지·남편이었으며 히틀러의 명령에 충실한 ‘공무원’이었다. 그는 규칙을 잘 알았고 충실했으므로 그의 행위는 ‘준법’에 부합했다. 문제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실어나르는 ‘최종 결정’(final decision)이 윤리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짓이었다는 점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그것은 정신병리적 요소(사이코패스 등)나 이데올로기적 확신(인종적 우생학과 같은) 탓이 아니라 사유의 결핍 때문이었다. 윤리적 파탄은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상투어와 관용어의 습관적인 사용, 특히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는 능력,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진부함’(banality of evil)이라 일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파국을 예방하려면 무엇보다 반성적 판단력, 곧 공통감(common sense)의 회복이 급하다고 판단했다.

‘고통의 윤리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도 공통감의 밑절미는 바로 고통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뒤 레비나스는 윤리적 삶이 끝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에 노출되어 상처받고 영향을 받아 타인을 위해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또한 그와 같은 타인의 부름과 호소에 응답해야 하는 책임이 인간을 윤리적 주체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내가 체험하는 고통은 무의미하고 나를 구속하지만, 타인의 고통받는 얼굴에 노출되어 내가 고통받을 때 그 고통은 윤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고통 없이 살고 싶다는 게 인지상정이다. 정녕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고통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진교훈), ‘불교에서 바라보는 고통’(최기표), ‘플라톤의 고통’(이기백)을 읽다 보면, 동서와 고금을 떠나 그것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통증 클리닉’은 가능해도 ‘고통 클리닉’은 요원한 셈이다.

위대한 선은 고통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통의 승화가 요청된다고 지은이들은 말한다. 고통에 대한 사유가 고통의 고통스러움을 넘어 선과 행복에 이르는 통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이 앞으로 펴낼 책에서 더 본격적인 논의를 펼쳐 보이길 기대한다. 그것은 아마도 (한길사 펴냄)에서 ‘야인 시절’ 김상봉 교수(전남대)가 돌에 새기듯 적은 문장의 심화·확장일 것이다. “고통은 때때로 인간을 깊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을 메마르고 이기적이 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천박한 이기심을 설명해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다. 고통 앞에서 인간이 깊어지느냐 아니면 천박하고 이기적이 되느냐는 고통 그 자체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어리석고 비열한 사람은 사소한 고통 앞에서도 자기의 무사안일만을 염려하지만,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은 큰 고통 속에서도 자기보다 이웃의 고통을 염려하는 것이다. 사실 참된 선이란 이처럼 고통 속에서만 검증될 수 있다. 사람들이 큰 염려 없이 안락한 삶을 사는 곳에서는 모두가 비슷하게 친절하고 선량해 보이지만, 막상 위험과 고통이 닥쳐오면 참으로 선한 사람만이 인간의 긍지와 양심을 지킬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비범하고 위대한 선은 언제나 그만큼 큰 고통 속에서만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고통이 용기를 낳고 존엄을 꽃피우며 윤리를 지탱한다는 설명이다.

‘고통의 사유’ 맨 밑바닥에 이르러서야 행복을 만날 수 있다지만, 모래알처럼 파편화해 유대와 공감이 스러지는데다 현실은 ‘9988124’를 꿈꾼다. 99살까지 팔팔(88)하게 살고 하루이틀(12) 앓다 죽자(4·死)는 것.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 힘든 이유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람으로 연대하는 ‘행복한 사슬’이 진정 우리의 꿈이라면, 고통하는 이가 흘리는 눈물과 고통받는 이를 보며 흘리는 눈물이 ‘반드시 그리고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게 이 책의 고통스런 목소리다.

전진식 기자 한겨레 편집2팀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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