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 펴냄, 9500원
는 20세기의 끝자락인 1995년 포르투갈의 용접공 출신 소설가 조제 사라마구가 일흔셋에 발표한 소설이다. 세기말의 묵시록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설은 1998년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국내에도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번역돼 소개됐고, 2002년 세련된 양장본 개정판으로 다시 나오는 등 세월에 묻히지 않는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최근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하면서 조용히 명성을 이어가던 소설은 10년 만에 다시 베스트셀러 순위 1·2위를 다투고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소설이 원작임을 앞세운 영화 홍보에 힘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영화보다 원작 소설이 뛰어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호기심 많은 독자를 원작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차들로 꽉 찬 도로 한복판에서 한 남자가 시력을 잃는다. 그를 집까지 데려다준 남자, 그를 진찰한 안과 의사, 안과 의사한테 진찰을 받은 사람들, 그 사람들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 눈이 차례로 멀기 시작한다. 우유 속을 헤엄치는 듯한 먹먹한 백색으로 눈이 머는 ‘백색 질병’이 도시에 일파만파 퍼져나가지만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만은 눈이 멀지 않는다. 위험을 감지한 당국은 눈먼 사람들을 모두 정신병원에 가둬놓고 방치한다. 정신병동은 순식간에 말 그대로 지옥이 되고, 눈이 멀었다고 속이고 남편을 따라온 의사의 아내는 홀로 그 풍경을 남김없이 목격한다. 아무 데나 침을 뱉고 오줌을 싸고 똥을 눠 배설물이 양탄자처럼 깔린 병동 바닥, 남의 몫의 식량을 빼돌리는 사람들, 공포에 짓눌려 눈먼 사람들을 무참히 사살하는 군인들, 무기를 앞세워 식량을 담보로 여자들을 강간하는 남자들….
작가는 눈먼 사람들의 공포와 욕망이 만들어내는 아수라장을 단락 구분이나 인물의 대사 구분도 없이, 그저 마침표와 쉼표로만 이뤄진 빡빡한 서술 속에 담아낸다. 눈먼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종말론이나 하늘의 계시를 들먹이지 않지만, 종교적이고 교훈적인 묵직한 분위기는 소설 전체를 적시고 있다. 눈은 인간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상징물로 묘사되고, 안과에 있는 스캐너는 죄인의 영혼을 곧바로 들여다보는 고해소에 비유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몸을 씻는 사람들은 마치 세례를 받듯 더러움과 악을 함께 씻어낸다. 전지적 시점의 서술은 독자를 의사의 아내처럼 ‘눈이 멀지 않은 오직 한 사람’의 위치에 자리매김하면서 효과적으로 작가의 교훈적 의도를 전달한다.
눈이 먼 인간들은 한순간에 그들이 소유했다고 굳건히 믿고 있던 모든 걸 잃는다. 오감 가운데 시각 하나만 잃었음에도 인간성마저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무지한 사람들을 향해,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의사의 아내 입을 빌려 말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461쪽)
김일주 기자 한겨레 책·지성팀 pearl@hani.co.kr
* 2008년 11월29일치 15면 ‘책과 생각’에 실린 글을 재편집했습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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