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1만원
김연수(38·사진)씨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는 1930년대 초 북간도의 조선인 사회를 뒤흔들었던 ‘민생단’ 사건을 소재로 삼는다. 민족 독립과 계급 해방을 꿈꿨던 조선 혁명가들이 서로를 일제의 첩자로 몰아 무려 500여 명의 희생자를 낳은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민생단 사건이었다. 작가는 김해연이라는 만주철도 소속 젊은 측량기수를 사건의 한복판에 떨어뜨려놓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 역사적 비극의 뼈대와 속살을 만져볼 수 있도록 한다.
소설은 김해연이 사랑하는 연인 이정희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문을 연다. 용정의 여자학교 음악선생인 정희는 해연의 거듭되는 편지와 구애에도 확실한 대답을 미루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는데, 그것은 그가 자살을 앞두고 쓴 마지막 편지이기도 했다.
정희의 자살과 편지는 시인을 꿈꾸던 낭만적인 청년 해연을 삽시간에 역사의 격랑 속으로 밀어넣는다. 정희가 혁명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해연은 일본 경찰에게 연행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야 알게 된다. 조사 과정에서 사토 경부는 해연에게 묻는다. “이정희도 너를 사랑했는가?” 의아해하는 해연에게 사토는 서류 한 장을 내민다. 그 서류는 해연에게 정희를 소개해준 박길룡이 정희의 애인이라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처에 말뚝을 박듯 사토는 덧붙이지 않겠는가. “너는 분명히 운명 때문에 이정희를 사랑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정희를 사랑하게 된 거야.”
정희의 죽음 이전에는 그토록 자명해 보였던 진실이 사토가 내민 서류를 보는 순간 한없이 흐릿하고 모호하게 바뀌고 만다. “그로부터 내가 알던 세계는 완전히 허물어졌고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이면을 똑똑하게 보게 됐다.”
똑똑하게 보게 됐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확인해야 할 것들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아편에 빠져들다가는 자살을 시도하는 등 한동안 자신을 내팽개쳤던 해연은 마침내 정희의 죽음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대장정’에 나선다. 그 장정의 끝에서 그는, 정희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했는지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정희의 사인을 확인하는 과정은 양파 껍질을 벗기는 일과도 같다. 한 꺼풀을 벗겨 진실을 확인했다 싶으면 이내 그 이면의 또 다른 진실이 얼굴을 내민다. 그 과정에서, 정희가 학생 시절 함께 비밀조직 활동을 했던, 박길룡을 포함한 네 남자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하나같이 정희를 사랑했던 그 남자들은 연정과 질투가 혁명을 향한 노선 다툼과 구분할 수 없도록 뒤얽힌 가운데 서로에게 차례로 죽임을 당한다. 조선인 유격 근거지에 들어가서 해연이 목격하고 연루된 민생단 사건은 그런 갈등의 정점을 이룬다. 여기에다 정희가 정보 수집을 위해 일본군 장교 나카지마와 연인 관계로 지냈다는 사실까지 확인되면서 정희의 정체는 천사와 요부 사이를 격렬하게 널뛰기한다.
소설 말미에서 해연은 권총을 들고 정희의 옛 동료 출신으로 일본 영사관 경찰보조원으로 전향한 최도식을 찾아간다. 정희를 죽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함으로써 일종의 ‘시적 정의’를 이루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 퇴고 과정에서 최도식의 어린 아들들을 목격한 해연이 복수를 포기하고 돌아 나오는 것으로 처리됐다. 이렇게 결말이 바뀐 데에는 지난 5월 말 촛불시위에 나가서 보았던 젊은이들의 발랄한 모습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 이게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라면.”(‘작가의 말’)
최재봉 기자 한겨레 문화부문 bong@hani.co.kr
* 2008년 10월4일치 12면에 실린 글입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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