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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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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왕기춘이라면 어떠했겠는가

등록 2008-08-22 00:00 수정 2020-05-03 04:25

‘스포츠’나 ‘올림픽’이란 이름에서 허장성세를 걷고 선수의 애틋한 눈물을 위로하자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 사진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보라, 자신의 문명을 불태우기 시작한 숲들/ 가장 나중의 임종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니/ 문명은 비워진다 보라, 사람아.’(김선우 ‘화염 도시’ 중에서)

시인은 언젠가 그렇게 말하였으나 현실은 언제나 시인의 묵시록적인 비장비애를 가볍게 사양한다. ‘아, 그런 비탄은 됐구요’, 인위의 문명은 거룩한 자연 치유를 사절하고 가공할 만한 불길에 몸을 던진다. 2008년 8월8일 저녁 8시, 베이징의 세리머니는 그런 욕정의 일그러진 오르가슴이었다.

비둘기 날린 베이징 밤 하늘이 아름다워?

그 인위의 한두 가지 요소가 ‘컴퓨터그래픽’이거나 ‘립싱크’였다는 뒷말들은 작은 소동에 불과하다. 수천 년 기나긴 역사를 2시간 이내의 압축파일로 저장하기 위해 장이모 감독은 불의 이미지를 변주하였으나 막간의 짧은 시간들은 의외로 지루했고, 무엇보다 ‘과연 저 사람이 그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만큼 상투적이고 진부한 관념이 난무했다.

웬 비둘기? 과연 장이모 감독의 선택일까, 의아스럽다. 개막식에서 이쁘장한 여자애가 노래를 불렀는데, 원래는 노래 잘하는 아이가 따로 있었으나 리허설 과정에서 공산당 간부가 ‘얼굴이 영 아니니까 교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쁜 아이가 ‘립싱크’를 하고 안 이쁜 아이는 뒷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 정황들 때문에 비둘기가 등장한 것일까? ‘비둘기=평화’라는 진부한 상징이 말해주듯이 장이모 감독이 총연출한 개막식은 중화주의라는 욕망의 일그러진 사정이었다.

외신에 눈이 밝지는 않으나, 몇몇 외신들이 이번 올림픽 개막식에 대해 조금은 ‘냉정한’ 제목과 기사를 내보냈고, 중국 내부에서도 ‘공산당의 쇼타임’이라는 비아냥이 없지 않은 듯하다. 아마도 일정한 사유의 거리를 갖지 못하고 ‘인류의 제전’이니 ‘우애와 평화의 축제’ 운운한 것은 국내 미디어들이었을 것이다. 개막식 중계 도중에 자막 처리와 멘트에서 실수가 있었다는 것쯤이야 작은 소동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당일 뉴스의 첫머리나 다음날 조간의 1면 제목들이 정말로 온 인류가 ‘우애와 평화’를 위해 4년 동안 올림픽만을 고대해온 듯이 너무나 유치찬란한 언어들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로 방송사나 신문사에 찾아가서 묻고 싶었다. ‘정말로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셨나요?’ ‘정말로 지구촌 대축제 평화의 한마당이던가요?’ 온갖 미디어가 쏟아내는 그 진부한 말들은, 동네 빵가게 개업 때 세워놓는 풍선 허수아비처럼 현실감을 상실한 채 공허하게 떠돈다.

이는 미디어가 스포츠를 ‘성찰’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스포츠’ 또는 ‘올림픽’이라는 단어를 제시할 때 거의 자동기술법으로 연상되는 단어들을 줄줄이 꿴 것일 뿐이다. 중국 내부에서도 ‘공산당의 쇼타임’이었다는 비판적인 시선이 있는데, 우리 방송과 신문은 ‘평화의 제전’이요 ‘찬란한 개막식’일 뿐이다. 이는 올림픽이나 스포츠를 성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거대한 구조의 관습적인 질환이다. 그래서 ‘평화’를 상징한답시고 비둘기를 날리는 장이모 감독의 진부한 허장성세에 대해 국내의 중계 방송은 “아, 베이징의 밤 하늘은 아름답습니다”라는 유치한 멘트를 날리는 것이다.

‘칼을 들고 목각을 해보고서야 알았다/ 나무가 몸 안에 서로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 촘촘히 햇빛을 모아 짜 넣던 시간들이 한 몸을 이루며/ 이쪽과 저쪽 밀고 당기고 뒤틀어가며 엇갈려서/ 오랜 나날 비틀려야만 비로소 곱고/ 단단한 무늬가 만들어진다는 것.’(박남준 ‘각’ 전문)

선수 몸에서 우러나는 두 액체의 가치

우리가 올림픽에서 진실로 봐야 할 것은 화려한 개·폐막식이나 쾌청한 베이징 하늘이 아니다. 그 아래의 선수들, 그들의 몸속에 내장된 아름다움이다. 물론 ‘육체에 대한 찬양’은 언제나 파시즘의 혐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주물공장에서 방금 제련한 듯한 몸, 대리석으로 빚은 듯한 몸, 경이로운 기록을 성취해내는 비범한 몸, 머리카락에서 발끝까지가 모두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재조직된 몸, 평범하거나 게으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듯한 매끄러운 몸. 그런 몸들은 그러하지 않은 몸에 대한 편견과 오해와 시선의 차별을 야기하기도 한다. 완벽한 몸에 대한 과도한 숭배는 심각한 노동이나 불규칙하고 위태로운 일상 혹은 장애와 그 밖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그와 같은 목표를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몸을 경원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시선의 ‘제한 규정’ 내에서 보더라도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이 보여주는 몸의 경지는 틀림없이 비범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제약과 규칙 안에서 이뤄지는 동작들이다. 그 제약과 규칙의 틀 내에서 그것들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욕망의 힘을 선수들은 보여준다. 근육의 반응과 뇌의 명령이 미묘하면서도 절실한 시점에서 일치해 온몸이 격렬하게 반응하는(박태환이나 펠프스의 스타트를 기억해보라) 순간들은 그와 같은 화학적인 순간을 일상 속에서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관전자들에게 경이로운 탄성을 낳게 한다. 온몸을 물리적으로 사용하는 선수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짐짓 무심한 듯 가만히 표적지를 바라보는 사격 선수들의 표정은 한 군데 오랫동안 집중한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무념의 표정을 떠올려준다. 물론 이 선수들 뒤에는 거대 기업과 스포츠 과학과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과 첨단장비들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선수들의 몸에서 우러나는 두 종류의 액체만큼은 과학의 선물이 아니다. 땀과 눈물! 그것은 투명하면서도 짜다. 그것은 비과학의 영역이며 작위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것, 곧 선수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소산일진대, 그러니 선수들이 흘리는 땀과 눈물을 함부로 말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유도 73kg급 은메달리스트 왕기춘이 펑펑 울었다. 결승전 시작을 알리는 벨의 여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13초 만에 패했다. 13초. 그 순간 당신이라면 어쩌겠는가. ‘뭐, 세계 2위니까.’ ‘금메달 지상주의 따위는 나부터 없애야지.’ ‘아름다운 2인자의 미소를 보여주자구.’ 누가 그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8강이면 다행이고 메달권이면 신의 은총이라고 여기는 실력이었다면 모를까, 원래부터 금메달이 목표였고 또한 그것이 가능했던 선수가 13초 만에 패했을 때, 눈물 아니라면 누구 있어 그를 위로해준단 말인가.

폐막식에 동원될 작위의 언어를 아껴라

금메달 지상주의와 그에 따른 스포츠 국가주의를 배척하기 위해 우리 사회는 꽤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이제는 ‘금메달이 최고는 아니다’는 게 상식이 되었지만, 그런 상식이 섬세한 배려와 이해가 아니라 하나의 도그마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박태환(수영)의 웃음, 왕기춘(유도)의 눈물, 이배영(역도)의 미소 모두 인위의 조작이 아니라 뇌의 명령조차 통하지 않는 몸의 순수한 반응이었다. 수많은 선수들이 뜻한 바를 이루거나 혹은 그러하지 못해 눈물을 또 흘리게 될 것이다. 온갖 작위의 허장성세로 가득 찰 개·폐막식에 동원될 그 많은 말들을 조금 아껴서 선수들의 애틋한 눈물을 위로하는 데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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