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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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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불 다루듯 조심조심

등록 2008-07-08 00:00 수정 2020-05-03 04:25

젊은층에서 늘어나는 화병… 무조건 참는 것이 미덕이 아니고, 무조건 내는 것도 능사가 아닌 화를 제대로 내는 법은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참는 자에게 화가 있나니

불현듯 그가 떠올랐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해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화병질환 진료현황’을 받아들었을 때 잊고 있던 그의 존재가 되살아났다. ‘그때 그 시절’ TV 앞에 바짝 다가가 앉은 아이들을 향해 매일 한결같은 노래를 들려주던 그. 그가 부르던 노래는 대략 이러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그렇게 참아대던 그 녀석, 화병 안 났을까.
바야흐로 분노의 시대다. 그렇게 먹기 싫다는 미국산 쇠고기를 무슨 연유에선지 아득바득 먹으라고 안달이고,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니 물대포가 날아온다. 물가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더운 날씨마저 속을 끓인다. 이제 참는 것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 지난해 그렇게 “참고 참고 또 참”다가 화병에 걸린 사람이 4869명이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이제 고쳐져야 한다. ‘참는 자에게 화가 있나니, 저희가 화병을 받을 것임이라.’ 참지 마라 참지 마, 화병 날라.

“그 애는 나와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솔직히 같이 다니기 싫어.”

지난 3월 가깝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다른 친구 이야기를 꺼낸 게 화근이었다. 그 말을 한 다음날부터 학교 친구들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말을 걸어도 대꾸하는 이가 하나도 없고, 인사를 건네도 받아주는 친구가 없었다.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할 때 “같이 다니기 싫다”고 지목한 그 친구가 다가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냐”고 따져물었다. 그는 주변에 친구도 많고 학교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아이였다. “미안하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항상 어울리던 친구들도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말다툼 도중 나타난 안면마비

올해 고교 1학년이 된 안지연(17·가명)양은 그 일이 있은 뒤 학교만 가면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슴에 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답답하면서 숨이 막혔다.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무언가 치밀어오르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소화도 잘 안 되고 두통도 심해지면서 약을 달고 살았다.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아봤지만, 의사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녀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간혹 의사들은 ‘신경성’이란 말로 증세를 설명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초등학생 때 수년 동안 친구들의 집단 따돌림을 경험했던 터라 불안한 마음은 더욱 커져갔다. 친구들을 만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했지만 또 상처를 받을까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꾹꾹 참았다. 사람이 무서워졌다. 안양은 “학교에서 친구들이 귓속말하면 ‘혹시 내 이야기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친구들이 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에 열이 나면서 뻐근해졌다”고 했다. 몸의 이상징후부터 해결하기 위해 좋다는 약과 식품을 구해 먹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친척에게 “화병 증세와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다. 급기야 지난 6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 화병클리닉을 찾았고, 화병 진단을 받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참아왔던 억눌린 분노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주부 윤현미(51·가명)씨는 지난 5월30일 응급실을 찾았다. 남편과 말다툼 도중 안면신경 마비 증세가 나타나서였다. 얼굴 오른쪽 신경이 마비되면서 입이 보기 흉하게 돌아갔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며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게 되면 증상이 더 심해진다”고 설명했다. 당장의 증세도 문제였지만 마음의 병을 가라앉히는 것 또한 중요했다. 윤씨는 “지난 30년 동안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며 “얼마 전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났지만 갱년기 증상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했다. 그는 남편의 외도와 성격 차이로 갈등을 겪으면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다 결국 화병을 얻었다. 윤씨의 남편은 “아내의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지 몰랐다”고 했다. 윤씨는 현재 침, 약물, 명상 등의 화병 치료를 받으면서 안면신경 마비 증세를 바로잡는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화와 스트레스의 차이

한국인 특유의 화병이 다시 건강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7월2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공개한 ‘2004~2007년 화병질환 진료현황’을 보면, 그동안 화병으로 병원 치료를 받은 환자는 2004년 2861명에서 2005년 3135명, 2006년 3703명, 2007년 4869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지난 4년 사이 전체적으로 2천 명 이상 늘어난 셈이다. 특히 화병과 거리가 먼 계층으로 여겨졌던 10대, 20대의 증가폭이 두드러졌다. 2004년 74명에 불과했던 10대는 2007년 215명으로 3배가량 늘었고, 20대 역시 229명에서 456명으로 2배 정도 늘었다. 주로 40·50대 중년 여성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화병이 10대, 20대 젊은 층 사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의 김종우 화병클리닉 교수는 그 이유로 학교생활의 스트레스와 입시·취업 스트레스를 꼽으면서 우리 사회에 화병 환자가 느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쟁이 심해진 탓도 있겠지만, 그동안 한국 사회가 구성원들의 이런 스트레스와 분노를 풀어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지 못한 측면이 적지 않습니다.”

화병은 태어나면서부터 생기는 질환은 아니다. 성장하면서 가족 관계나 사회적 상황 등 여러 외적 요인에서 오는 감정을 제대로 풀지 못해 생기는 병이다. 이는 불완전하게 억제된 감정이 장기적으로 쌓여서 발생하는데, 보통 같은 스트레스를 6개월 이상 받아 생긴다. 심리적 요인이 큰 만큼 주로 인간관계가 문제가 된다. 남편의 외도나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갈등, 학교에서의 따돌림 등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또 가난이나 돈 문제, 불경기, 취업난과 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으로 화병에 걸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김 교수는 “화병은 시국과 경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스트레스와 분노를 풀고 해결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화병은 일반적 스트레스와 분명히 다르다. 스트레스가 외부 자극에 대한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면, 화병은 그런 스트레스가 오랜 시간 누적되면서 나타난 구체적 증상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증상은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예고 없이 터져나온다. 최근까지 스트레스를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라도 갑작스럽게 폭발하듯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화병의 증상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대표적으로 가슴이 답답하거나 아프고 숨이 막히는 증세를 꼽을 수 있다. 화병은 불의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다. 뜨겁게 타면서 위로 올라가는 불의 성질처럼 화병 환자는 가슴은 물론 얼굴과 머리에서 열이 느껴지고, 무언가 가슴에서 치밀어오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뜨거운 기운으로 몸이 건조하게 돼 자주 목이 마르고, 대변이 굳고 소변이 붉어진다. 화병은 심해지면 풍을 유발하기 때문에 간혹 경련이 일어나거나 코피를 쏟기도 한다. 이 밖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두통, 어지럼증, 식욕감퇴, 소화불량, 불면증 등의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

치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

화병 치료의 최우선적 목표는 이같은 증상을 치료하는 데 있다. 증상이 해결되지 않으면 환자는 더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화병을 치료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그 병의 원인이 되는 개인적·경제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은 쉽지 않다. 스트레스 주는 부장님을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불경기를 하루아침에 호경기로 돌려놓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화병클리닉이나 화병전문 병원에서는 한약물, 침, 부항과 뜸 등으로 화의 기운, 즉 화병의 여러 증상을 가라앉힌 뒤 명상 치료를 통해 분노와 화가 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를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자기 통제력을 키운다.

그러나 이런 치료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방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분노와 화를 조절하면 화병을 미리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분노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지금 화난 상태를 떠올려보자. 가슴을 움켜쥐고 ‘참을 인’(忍)자를 그리는가, 아니면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던져버리는가. 분노를 안으로 삭이는 경우라면 신체에 당장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만, 이런 행동이 습관적으로 굳어지면 우리 몸은 분노를 당연히 참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강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다. 김 교수는 “피해의식은 상대방에 대한 분노, 저주, 혐오감, 원한 등의 스트레스 증상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반대로 분노를 쉽게 드러내면 사소한 일에도 무의식적으로 분노를 표현하게 되고, 자주 혈압이 올라가면서 심혈관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이 경우 화를 낼 때도 문제지만 분노를 표출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몸은 전보다 몇 배나 더 큰 분노를 느끼게 되면서 위험에 빠진다. 몸은 분노를 밖으로 드러내려고 하지만 주위 환경이 이를 강제적으로 막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화는 무조건 참는 것이 미덕이 아니고, 무조건 내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화는 제대로 내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분노를 조절하는 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화가 날 때 계속 참기만 해서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화가 폭발할 때는 반대로 대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 화가 폭발한 상태에서 대화를 하는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이 경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뒤 논쟁을 연기하고 마음이 안정된 뒤에 대화를 다시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또 화를 낼 때는 구체적으로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좋다.

“우리 몸은 습관대로 반응합니다”

‘내가 화가 난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면 좋겠는가’ 등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화를 내다 보면 ‘어버버버’ 울분만 토할 뿐 도리어 망신만 당하기 십상이다. 김 교수는 분노를 스스로 조절하기 위한 도움법으로 명상호흡법과 전신 마사지를 추천했다. “명상은 마음의 안정과 집중력을 길러주고, 마사지는 근육이완과 혈액순환에 도움을 줍니다. 꾸준히 노력하면 자기조절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습관대로 반응합니다.”

참고한 책: (이상 여성신문사)



김종우 교수의 초간단 명상호흡법

잡념이 들면 처음부터 다시!

명상호흡법은 단전호흡법에 명상을 결합해 만든 자기치료법이다. 생체에너지가 모이는 배꼽 아래 부위를 중심으로 깊게 호흡함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고 몸을 편안한 상태로 만드는 방법이다. 명상의 기본은 마음의 안정과 집중이다. 숨쉬는 것에 집중하는 명상호흡법은 초보자가 가장 쉽게 할 수 있으면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다.

1. 먼저 가부좌 자세를 취한다. 방석을 이용해 엉덩이 부위를 약간 올리면 훨씬 편하다. 허리를 곧게 세운 뒤 어깨는 편안히 두고 턱을 가슴 쪽으로 조금 당긴다. 눈은 1m 앞쪽 아래를 본다.
2. 코로 호흡을 시작한다. 가슴이 움직이는 호흡보다는 배가 움직이는 복식호흡이 좋다. 복식호흡이 힘들겠지만, 숨을 내쉬면서 배를 약간 접어넣는다고 생각하며, 손으로 가볍게 눌러주면 도움이 된다.
3. 한 호흡에 10초 이상 걸릴 정도로 천천히 쉬어야 한다. 한번 숨을 쉴 때마다 하나씩 숫자를 센다. 1부터 10까지 세면 다시 1로 돌아간다. 다른 생각이 들어 명상을 방해하면 단지 ‘잡념이 있구나’라고 생각한 뒤 다시 호흡을 세도록 한다. 잡념은 당연히 나는 것이다. 그것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다.
4. 10분 정도 한 뒤에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명상을 하며 50번 정도의 숫자를 세는 게 익숙하다면 100을 세는 것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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