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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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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 검박함

등록 2008-07-04 00:00 수정 2020-05-03 04:25

비가 오면 듣고 싶어지는 음악… 툭툭 떨어진 비가 굵어져 멎을 때까지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날이 흐리더니 기어이 한두 방울씩 툭툭 떨어질 때,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빗방울이 창을 두드릴 때, 잠시 하던 일을 멈추게 된다. 거리에서 만나는 소나기는 얼마나 청량한가. 그리고 비가 그친 뒤 아련하게 퍼지는 아스팔트의 냄새. 여름이다. 여름이다. 여름이다. 그리하여 나는 되뇐다. 살아 있구나. 땡볕에 축 늘어졌던 심신이 살짝 조여온다. 누구나 한두 자락씩은 갖고 있을 비와 사랑의 이야기도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절로 소주에 부침개 생각도 난다. 제아무리 탱탱한 활도 느슨해지는 장마철, 마음도 그러하다. 마음이 느슨해지니 음악이 자연스레 당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우산을 펼치듯 음악을 듣는다.

비가 올 때 가장 생각나는 장소는 방구석이다. 에어컨이 없어 활짝 열어둔 창밖이 갑자기 흐릿해지고 투둑, 투둑 소리가 나기 시작할 때면 담배에 불을 붙이게 된다. 잠시 창밖을 보며 빠르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지켜본다. 사르르, 기분이 말랑말랑해진다. 여성 싱어송라이터인 시와의 를 듣고 싶어진다. 서울 홍익대 앞 라이브 클럽인 ‘빵’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 4곡이 담긴 EP를 냈다. 어쿠스틱 기타에서 퍼지는 명징한 울림 위에 단정한 멜로디를 흘려보내는 시와의 음악을 들으면, 루시드 폴의 데뷔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방구석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 검박함이란. 지하철도, 거리도, 소란한 카페도 아닌, 비 오는 날의 방구석을 위한 배경음악으로 포크만 한 음악은 역시 없다. 편성이 단출할수록 여운은 크다. 시와의 음악이 그런 바람에 꼭 들어맞는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누가 여름비 아니랄까봐,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곤란해진다. 창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담배도 못 피운다. 숨어 있던 열기가 스며드는 방도 후더워진다. 하지만 무릇 비가 내리면 흩어지는 연기 뒤편으로 쏟아지는 빗자락을 음미하고 싶은 게 애연가의 마음. 결국, 나는 창문을 연다. 빗줄기가 야무지게 들이치면 CD 한 장을 꺼내 건다. 빌리 홀리데이의 (Lady In Satin)을. 빌리 홀리데이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게 이 앨범이지만, 사실 은 그의 전성기적 목소리를 담고 있는 앨범이 아니다. 약물과 알코올 남용 끝에 짧은 인생의 마지막 촛불을 태워 올리던 시절의 음악이다. 그래서 더 절절하다. 그의 비극적 사연 때문이 아니다. 세상에 또 누가 이런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을까. 첫 곡에서부터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다. 쩝쩝, 마른 침에 입술이 달라붙는 소리도 그대로 전해진다. 깊이 연기를 빨아들인 뒤, 재빨리 커피를 뽑는다. 평소보다 진하게. 들이치는 빗소리와 한데 섞여 들어가는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그가 이 앨범을 녹음한 1958년 2월, 뉴욕의 컬럼비아 스튜디오에도 싸늘한 겨울비가 그치지 않았을 것 같다. 비는 무릇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물줄기인데 나는 왜 이런 죽음의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인가. 감성의 수풀이 충분한 수분으로 삽시간에 우거지기 때문일 거다.

비가 그친다. 새가 다시 울기 시작한다. 해는 뜨지 않아도 좋다. 나무와 흙, 아스팔트의 냄새가 한곳에 섞여 방 안 가득 퍼진다. 그 시간이 낮이라면 모던록 밴드 스웨터가 부른 를, 밤이라면 스코틀랜드 밴드 카메라 옵스큐라의 〈Fan〉이 딱 그 싱그러움을 잡아낸다. 비 그친 낮의 냄새는 화창하고, 밤의 냄새는 처연하기 때문이다. 둘 중 어느 노래라도 좋다. 자연의 향기를 좀처럼 느끼기 힘든 도회의 삶에서, 스웨터와 카메라 옵스큐라의 음악은 주변 모든 것들의 존재를 코로 느끼게 한다. 그 향기를 극대화하는 공감각의 첨가물이다. 말 그대로 싱그러운 냄새다. 어쩌면 나는 이 싱그러움을 느끼려 비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더위에 쉼표를 찍어주기에 더욱더. 그 쉼표의 검은 동그라미를, 음악으로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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