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근의 파격 설계와 김현옥의 저돌 공정이 만들어낸 국내 최초 주상복합 건물… 아파트에서 공중통행로를 천천히 걸어 청계천까지
세운상가, 근대화의 외로운 섬을 찾아가다
1960~70년대 서울 근대화를 대표했던 콘크리트 기념비는 이제 점점 박물관으로 변해간다. 전자제품 시장의 대명사이면서도‘흉물’로만 생각했던 세운상가의 변신. 사람들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주상복합’ 건물이 서울의 근대화 역사 위에 떠다니는 외로운 섬이었다는 것을. 건물 안팎에 문화가 스며 있었다는 것을. 서울 종묘~남산 녹지축 복원을 위해 올 하반기 종로쪽 세운상가가 철거된다. 대중들의 시선은 더욱 애틋해졌다. 육중한 상가 앞에 제품 대신 흔적을 찾으려는 답사객들이 모여든다. 휴대용 캠코더나, DSRL 카메라를 들고 세운상가의 미로 속에서 향수를 소비하는 숨바꼭질을 하려는 것이다. 설계자 김수근의 빛바랜 40여 년 전 구상과 이곳에 얽힌 숱한 이들의 자취를 살피는 세운상가 ‘생생투어’ 현장.
▣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감미옥에서 봅시다!”
세운상가 답사객들은 대개 서울 종로3가 세운상가 건물 옆 설렁탕집 ‘감미옥’ 앞에서 모인다. 지난 4월 중순 어느 날 취재진도 오전 10시30분 이곳에서 시민단체 문화우리의 도시경관기록보존 프로젝트 팀과 만났다. 삼각대와 각종 카메라 장비 등으로 ‘무장’한 이중재 사무국장과 최미영 연구원, 동행한 회원들 서너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분주한 1~4층 상가는 놔두고, 5~13층 아파트 공간으로 올라간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사해 비어 있는 옛 아파트 공간을 탐험하려는 것이다.
26평짜리 ‘70년대풍 고급 주거 공간’ 속으로
1967년 11월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로 완공된 세운상가는 지금도 가장 통 큰 건축물로 통한다. 종묘를 내려다보는 종로 세운상가 현대아파트의 13층짜리 타워 건물을 시작으로 청계천 대림상가, 을지로∼마른내의 삼풍상가를 거쳐 퇴계로 부근의 신성·진양상가까지 남쪽으로 1km 넘게 5~13층짜리 건물 덩어리들이 잇따른다. 답사의 핵심은 간판 격인 종묘 맞은편 현대상가다. 2006년 서울 강북 도심 재개발 계획이 본격화하면서 올해 중 철거되는 1단계 사업 대상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 터와 언저리에 12~36층짜리 주상복합 건물군과 녹지공간이 생긴다.
1~4층 상가 쪽은 아직 분주히 영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5~13층 아파트 공간은 거의 대부분 보상을 받고 방을 비운 상태였다. 관리인 허락을 얻어 고풍스런 타일이 둘레에 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의 1110호와 10층의 1003호, 7층의 707호 내부를 누비고 다녔다. 안방과 거실, 작은방, 식모방 등이 딸린 70년대풍의 26평형짜리 고급 주거 공간이다. 창밖으로는 남산 쪽을 향해 뻗어간 세운상가의 거침없는 건물 동선이 잡힌다. 여주인이 30년 이상 살다가 한 달 전에 나갔다는 707호로 들어갔다. 곧 답사객들의 탄성이 터졌다. “정말 멋진 유물인데요!”
벽장 속에서 주인이 놓고 간 70년대 각종 업소의 종이가방, 비닐백 뭉치가 쏟아졌다. ‘삼풍 슈퍼마아켙’ ‘종로 4가 하이웨이 의상실’ ‘신신포목점’ 등이 새겨진 알록달록한 종이가방이 수십여 점 온전히 남아 있었다. S자형 상징을 사용한 70년대 신세계백화점의 쇼핑 가방, 미원 김장세트 비닐백 등도 보였다. 80년대 잡지 와 70년대 목욕탕의 타월 등도 비닐이나 가방 속에 포장돼 남아 있었다. 신난 답사객들은 가방들을 주섬주섬 꺼내 펼쳐놓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작은방 캐비닛 한구석에는 그 시절에 사용했던 소형 금고가 달려 있었다. 노년 부부가 살았다는 10층의 1003호엔 70년대에 수집했다는 조선시대 기와 등의 골동품과 수석 등이 창가 장롱에 남아 있어, 창밖 세운상가의 풍경과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11층 1110호는 창문 밖으로 녹음에 둘러싸인 종묘 정전의 엄정한 지붕 윤곽이 눈에 아리도록 들어왔다. 이중재 사무국장은 연방 풍경을 찍으면서 “당시 서울 주택 중에서 이 정도로 조망권이 뛰어난 곳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뒤이어 14층 타워 옥상으로 올라가 종묘를 내려다보았다. 거칠고 드센 상가 건물의 수직적인 모양새에 맞서 지조와 품위로 북악산 축을 이끌고 내려오는 종묘 정전 지붕의 도도한 수평선은 단연 압권이었다. 건축가 신희창씨는 “왜 종묘가 위대한 건축물인지를 종묘를 가로막은 빌딩 옥상 전망으로 알게 됐다”며 “묘한 아이러니”라고 했다.
세운상가 현대아파트는 70년대 초·중반까지 건물을 지은 현대건설 간부, 중앙정보부 직원, 연예인들의 거처로 쓰였다고 관리인은 귀띔한다. 고급 주거시설과 일류 상가가 결합된 길이 1km가 넘는 대형 건물이 1966년 9월 기공 이래 1년2개월 만에 들어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0만 명의 상주 인구를 안았던 아시아 굴지의 건축물은 옥상 정원과 공중 통행 보도, 건물 내부 한가운데가 뻥 뚫린 ‘채광창+중정’ 구조 등의 서구 건축 유행까지 녹여넣었다. 군사정권과 밀착했던 건축거장 김수근의 파격적 설계 덕분이다. ‘돌격대장’으로 불린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의 저돌적 공정이 쾌속 완공을 뒷받침했다.
공간 미학이 살아 있는 실내 광장
그러나 성찰과 맥락이 부실한 서구 모더니즘 대형 건축물의 건설은 곧 ‘소화불량’을 낳았다. 강남 개발과 상권 이동으로 상가의 위세는 퇴색했다. 소음, 대기오염 등 주거 조건의 문제 때문에 아파트도 사무실로 전용됐다. 70년대 중반 이후 건물은 전자제품 상가로 업종을 특화했으나, 음란물 유통 창구로 슬럼화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일제 말기 공습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한 소개 지역으로 터를 닦았다가 해방 뒤 사창가로 변해버렸던 악연을 다시 되풀이한 셈이다.
3층으로 내려왔다. 건물 양쪽에 날개처럼 붙여놓은, ‘데크’라 불리는 공중 통행로를 천천히 걸었다. 1층으로는 차만 다니게 하고, 이 통행 보도에는 사람들만 걷게 해 교류의 마당을 만들겠다는 게 김수근의 원래 구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통 물품 상자들이 쌓여 있거나 가건물로 메워진 장터처럼 변했다. 실제로 현대아파트 거실 창에서 본 공중 데크의 흐름은 90년대 청계천 복원과 뒤쪽 삼풍상가 리모델링으로 일부 철거되면서 끊겼다. 남산까지 공중 통로로 통행하려던 김수근의 계획이 좌절됐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점심 뒤인 오후 1시30분. 1단계 철거 대상에서 빠진 남쪽 세운상가의 5~8층 공간으로 들어갔다. 중앙 공간을 확 틔운 실내 공간(중정)이 나타난다. 천장은 빛이 통과하는 반투명 플라스틱 판으로 씌우고, 둘레의 업무·주거 공간을 난간으로 쳤다. 한중간에 은은한 빛이 쏟아지는 실내 광장을 도입한 이 공간은 세운상가에서 김수근의 건축미학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명소다. 지금은 주위 방들이 사무실이나 창고로 쓰이지만, 약간 초현실적이면서도 쿨한 분위기의 광장 공간 덕분에 건축학도들은 세운상가에서 이곳 답사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철거하지 말고 미술관으로 쓰면 어떨까”라는 의견도 나왔지만, 8층 ‘맛나식당’에서 미나리를 다듬던 아주머니는 “일하기 불편하고 이동할 때도 빙빙 돌아야 하는 이 건물이 왜 좋으냐”고 반문한다.
오후 2시30분. 일행은 세운상가의 남쪽 끝인 청계천과 만난다. 청계천 복원 때 만든 세운교와 뾰족한 기념 조형물 너머로 다음 건물인 대림상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대림상가와 세운상가의 경계는 80년대 험악한 인상의 ‘형님’들이 음란물을 강매했던 음습한 골목 공간들의 추억이 깃든 곳. 지금은 도청기, 몰카 등의 광고판만 늘어서 있을 뿐이다. 대림상가 답사는 일단 답답하다. 세운상가 5~8층의 밝은 중정과 달리, 대림상가 위쪽의 5~8층 옛 아파트 공간은 카지노 전자오락기, 기계 부품 더미가 통로 가득 쌓여 압박감을 준다. 중정 공간도 건설회사들이 내부 공간을 넓히려고, 김수근의 설계보다 훨씬 좁게 중앙부 공간과 채광창을 쪼그라뜨렸다. 실망감 속에 옥상의 공중정원으로 나왔다. 접시·화분·장독 조각으로 만든 모자이크 벽화가 건물 벽체를 수놓으며 위안을 준다. 대림상가 남쪽 끝 타워와 더불어 유일하게 공공 벽화가 있는 영역이다. 67년 양화가 김주영이 당대 최대 규모로 제작한 벽화라고 한다. 갈라지고 퇴색한 벽화와 앞에 덩그러니 방치된 콘크리트 벤치의 너덜너덜한 모습은 미아 같기만 하다.
△ 쇠락한 첨단 남쪽 세운상가 5~8층 거주 공간 내부의 중정공간. 반투명 천장에서 중앙부가 틔워진 실내로 빛이 들어온다(왼쪽). 남쪽 끝 진양상가 타워 옥상에서 바라본 전체 세운상가의 역동적인 건물 동선. 멀리 북악산을 배경으로 건물 동선의 끝에 종로 세운상가 타워가 보인다.
오후 3시. 대림상가 남쪽 타워에서 을지로를 건너 도착한 삼풍상가는 ‘때깔’이 달랐다. 철거 대상에 아직 포함되지 않은 이 상가는 최근 리모델링을 해서 ‘삼품 렉서스’라는 강남풍 빌딩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보행자 공중 데크도 철거했고, 대리석과 화강석으로 깔끔히 치장했다. 옥상에는 적벽돌과 깔끔한 철제 조각으로 예술공원을 꾸며놓았다. 일반 이용객들은 좋겠지만, 상가 남북 축을 공중 통로로 잇는 김수근 설계 콘셉트는 단절돼버린다. 슬럼화를 벗어나려는 건축주의 뜻이지만, 이는 역으로 이 지역 상가의 재개발 과정이 북쪽 세운상가보다 훨씬 심각한 진통을 빚을 것임을 암시한다. 관할 중구청 쪽은 서울시의 세운상가 권역 재정비 계획이 건물 높이를 90m 이하로 제한한 데 반발하면서, 도시계획 절차도 거부하고 있다. 구청 쪽은 주민 여론이라며 200층 넘는 초고층 빌딩 건립을 주장해 문화재 동네를 경악시켰다.
중구청, 초고층 빌딩 주장해
오후 3시30분. 여정의 끝인 최남단 진양·신성 상가에 이르렀다. 인간의 온기가 가장 충만한 공간이다. 향기 가득한 꽃가게와 애완 강아지 등을 거래하는 상가들이 있고, 아파트에는 지금도 주민들이 소박하게 살고 있다. 색색의 천막을 입힌 아파트 베란다와 장독대, 화분이 보이고 음식 냄새도 풍긴다. 다른 상가에는 거의 없던 사람 사는 풍경에 답사객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고시원이 있는 진양상가 타워 옥상에서 보는 세운상가의 전체 모습은 박진감 넘친다. 근대화로 치달리는 폭주열차 같은 이미지다. 남산을 가장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해서 답사객들은 난간에 위태롭게 기대어 서서 사진 찍기를 멈추지 않는다. 세운상가의 길쭉한 축선, 그 양옆으로 충무로와 퇴계로 고층 빌딩들의 신축 공사장 모습이 엉켜든다.
세운상가가 언제 재개발을 끝내고 녹지축이 될지는 아무도 단정을 못한다. 상인들과 구청 쪽 반발이 거센데다, 일부 상가는 리모델링까지 마쳐 조 단위의 막대한 보상이 전제되지 않는 한 온전한 재개발은 어려울 것이란 비관론이 나온다. 최미영 연구원은 “지금 세운상가는 이권과 정치의 바다에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호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근대화의 인공섬이 되고자 했던 세운상가호는 난파선이 될 것인가. 이미 격랑은 몰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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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권역은 크게 4개의 상가·아파트 건물군과 주변 상가 지역으로 구분된다. 대략 점포 수만 3천여 개, 연면적만 10만 평에 육박한다. 방대한 규모만큼 관심사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성격의 답사 투어가 가능하다. 빨리 돌면 2시간 안에 가능하지만, 내력을 따져가며 답사하려면 종일 해도 모자란다. 사전에 상가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 등에서 파악하면 내실 있는 답사를 할 수 있다.
가장 무난한 답사길은 역시 건물의 동선을 따라가는 것이다. 종로 세운상가에서 진양상가까지 각 건물에 날개처럼 걸친 공중 통행로인 ‘데크’나 1층 차도, 실내 통로를 번갈아 오르내리면서 가는 길이다. 데크나 실내 광장(중정)에 집약된 설계자 김수근의 생각을 이해하기도 쉽다. 관리인 눈치를 봐야 하지만, 각 상가 고층 타워의 옥상과 저층부 옥상의 공중정원도 답사의 길목이다. 사진 찍기는 일부 상인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 있으니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건축 전문가들은 본 건물군과 미로 같은 주변 상가를 왔다갔다 하는 ‘지그재그’ 답사를 추천한다. 장사동, 인현동, 주교동 등 주변 지역은 수백 년 전 조선시대 필지가 남아 있는 곳들이 많다. 그 위의 한옥과 일제시대 건물에 공구, 식당, 의료기기, 보석, 인쇄 등 여러 업종이 지역별로 분포되어 있어 생생한 생활사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정구 구가건축 소장은 “세운상가 주변은 오랜 전통을 지닌 큰 동네 성격”이라며 “주변 지역별 특성과 근대 건축물 세운상가와의 관계 등을 살펴보는 게 흥미로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진양상가 인근의 2층짜리 옛 건물인 국수아파트와, ㅁ자형 골목길을 30여 가게가 둘러싼 종로의 장사기계공구상가 등을 명소로 추천했다.
철거될 세운상가 현대아파트 내부의 주거공간 탐방도 좋다. 마침 시민단체 문화우리(02-741-1878)가 이 아파트 707호실에서 5월24일부터 6월1일까지 특별전시를 한다. 그동안 수집한 이 아파트 안의 잔여 생활사 유물과 다기한 세운상가 사진들을 선보이는데, 덤으로 내부의 복도, 옛 거실 공간들을 구경할 수 있다. 최근 개방된 이 아파트 상가 14층 옥상도 종묘 풍경의 진수를 볼 수 있는 명소다. 답사정보는 ‘세운상가 도큐먼트’ 블로그(cafe.naver.com/sewoondocument.cafe)에 잘 정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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