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모네와 카스트로는 왜 쿠바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빠뜨렸나
▣ 박정훈 라틴아메리카 전문프리랜서
(피델 카스트로·이냐시오 라모네 지음, 송병선 옮김, 현대문학 펴냄, 3만2천원). 올 2월 피델 카스트로가 결국 사임하더니 며칠 전에 그의 자서전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됐다. 2006년 스페인어권에서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됐을 때 앨빈 토플러의 를 능가하는 반향을 불러왔다. 그해는 카스트로가 와병으로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자신의 직책을 임시 양도하여 전세계가 쿠바 권력의 향배에 호기심을 발동한 때였다. 바로 그때 저명한 국제문제지 의 편집인이자 유럽을 대표하는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이냐시오 라모네의 이 책이 서점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7년 중남미에 들렀던 필자는 멕시코시티의 한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스페인어판 제목은 였다. 유럽 지식인과 라틴아메리카 정치가의 ‘두 목소리’가 때론 공감하고 때론 긴장을 조성하며 책 전체를 엮어나가고 있다.
반정부 인사 중형 선고부터 긴장
라틴아메리카의 주권을 옹호했던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2003년부터 2년간 100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가 시작된다. 2장부터는 연대순으로 피델 카스트로의 인생 역정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카스트로는 문학작품을 탐독한 정치가답게 자신의 활약상과 주변 인물들을 묘파한다. 식사 메뉴까지 떠올리는 비상한 기억력이 돋보인다.
대지주 아들이 대지주 제도를 혁파하고, 교사의 폭력과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던 ‘영원한 반항아’는 독재에 맞선 반란자가 된다. ‘혁명가의 모범’ 아르헨티나인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의 주역이 되고 고작 8명의 생존자였던 게릴라들이 8만 명의 정규군과 싸워 이긴다. “통치하는 것이 더 힘든 일이었습니다.” 산악지대의 무장투쟁에서 승리한 뒤 수도 아바나에 도착했을 때 카스트로의 나이는 고작 32살에 불과했다. 그들 앞에 놓인 난관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사탕수수 산업 국유화 조처로 미국 기업의 이익을 침해하는 순간 쿠바는 미-소 대립의 한복판으로 성큼 들어섰다. 내적으론 불평등과 빈곤이 만연한 나라를 재건하는 난제가 놓여 있었다. 사회주의권에 현저했던, 의도와 결과의 심각한 괴리는 쿠바에서도 반복됐다. 카스트로는 대약진 운동을 모방한 것이 분명한 생산증대책 ‘1천만톤 전투’의 파괴적 결과를 외면한다.
미국이 열 명의 대통령을 교체한 반세기 동안 권좌에 앉았던 카스트로는 무려 600회가 넘는 암살 시도를 겪지만 살아남았다. 미국의 영토침략과 경제봉쇄에 맞서기 위해 1962년 10월 소련제 미사일을 설치했을 때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전쟁 위기가 가시자 쿠바는 제3세계 국가에 대한 ‘국제주의적 협력’을 본격화했다. ‘인종차별 군대’ 남아프리카공화국-미국 연합군에 맞서 앙골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쿠바의 지원이 없었다면 아프리카 서남부의 지도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혁명 수출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혁명적 폭력’이라 부른 게릴라 운동을 수출했다. 더불어 전위주의와 모험주의도 수출했다. 하지만 쿠바와 사정이 달랐던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에서 때론 ‘폭력의 악순환’을 낳았다는 명백한 사실을 외면한다.
이 시기까지 유럽 관중 라모네와 쿠바의 주인공 카스트로의 ‘두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공감이 비교적 돋보인다. 그러나 쿠바인들이 ‘비상 시대’(한국어판 역자는 ‘특별 시기’라 직역했으나 그 시대의 특징을 포착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라 부르는 1990년대를 회고하는 대목부터는 서서히 긴장이 조성된다.
동구의 몰락으로 쿠바 사탕수수 산업 구매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경제봉쇄로 쿠바를 고립시킨 미국은 아예 쿠바를 붕괴시킬 목적으로 쿠바인들이 불법적인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미국에 도착하면 비자와 주택을 제공했다. 또한 카스트로 정부를 비판하는 반정부 세력의 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003년 3월 쿠바 정부는 반정부 인사 75명을 체포해 중형을 선고했다. 같은 시기 미국행을 목적으로 두 건의 항공기 납치, 한 건의 선박 납치가 연쇄적으로 발생했을 땐 선박 납치범 3명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미국이 ‘반혁명 범죄’를 조장하고 연쇄 납치 사건으로 국가 혼란을 야기했기에 극약 처방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라모네는 인질들에게 신체적 피해를 입히지도 않은 납치범들을 사형시킨 사건을 조목조목 짚고, 평화적인 반정부 인사에게 중형을 선고해 ‘쿠바의 친구들’마저 등돌리게 했다고 지적한다. 두 목소리의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대목은 사하로프 인권상 수상자이며 쿠바의 대표적 반정부 인사 오스왈도 파야의 바렐라 계획에 대한 입장을 집요하게 묻는 곳이다. 바렐라 계획은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다당제)를 회복하자는 정치개혁 강령으로, 쿠바 법에 따라 1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의회에 청원했다. 카스트로는 이 온건 개혁안도 ‘미국 최후의 발명품’이라고 평가절하하고, 헌법을 개정해 쿠바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바꿀 수 있는 합법적 경로마저 막아버린다.
하지만 자의적 사법 행위와 고도의 권력 집중의 상호관계에 대해선 라모네도 제대로 문제 삼지 않는다. 납치범죄가 정치적 성격의 범죄로 둔갑하고 카스트로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견해를 반혁명이라 규정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다. 결국 카스트로는 사상통제와 일당독재를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영구화하려고 한다. 사회주의를 재정의해야 할 시대를 역행하는 대단한 착오가 아닐 수 없다. 쿠바에는 개인 숭배도 없고 자신의 결정은 모두 집단 토론의 산물이라고 한 주장도 일면적이다. 국가 광고 곳곳에 자신의 어록과 초상 이미지를 남기는 카스트로는 입법, 행정, 사법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쿠바는 시장과의 대결에서 이길 수 있나
쿠바 혁명의 성취가 의료와 교육에 있다는 것은 정치적 반대자들도 인정한다. 대표적 반체제 인사이자 의료기술자인 오스왈도 파야도 한국산 최신식 산소순환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내게 자랑하며 쿠바 의료보장 제도의 성과를 인정했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도 쿠바가 중남미 주요국 멕시코와 브라질보다 교육과 의료 부문 성취가 높다는 것을 알려준다.
카스트로 재임 시절 필자는 두 차례 아바나를 방문했다. 방파제 곳곳에서 시가를 직접 만들어 파는 청년, 호객 행위를 하는 관광용 마차 운전사, 팝콘을 만들어 파는 아줌마, 1달러를 구걸하는 청년들을 보았다. 쿠바에서는 그 모든 행위가 불법이었다. 일상생활 곳곳에서 국가의 오지랖은 참으로 넓다. 그래서 “최악의 사회주의도 최선의 자본주의보다 낫다”는 루카치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최악의 사회주의가 최악의 자본주의보다는 낫겠지만.
바야흐로 쿠바는 조용한 변화기를 맞고 있다. 이제 아바나 시민들은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처의 진정한 의미는 쿠바가 시장과 대결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는 것이다. 초강대국 미국의 도발을 막아낸 쿠바는 시장이 양산하는 풍요와 불평등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을까? 이민 희망자를 ‘룸펜’, 국가 재산을 훔치는 시민들을 ‘절도범’이라 비난하고, 경제 문제를 윤리로 접근하는 카스트로의 주장이 해결책이 못 되는 건 분명하다.
끝으로, 713쪽에 달하는 한국어 번역본에는 적잖은 오류들이 눈에 띈다. 원문의 ‘불평등’을 ‘평등’으로 옮기는 실수, 원문의 ‘예방전쟁’을 ‘선제공격’으로 번역하고, ‘사회주의 진영’(사회주의권)이라는 익숙한 용어 대신에 ‘사회주의 영역’이라는 생경한 어휘를 구사한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오타와 비문은 출판사의 성의를 의심케 한다. 이미 외국에서 출간된 수정증보판이 번역될 때 교정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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