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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원주민, 원어민을 숭배하다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영어’에 관한 10년간의 발표글 모은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문화방송에서 일요일 아침에 방송하는 는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신기한 일화를 보여주는 ‘재연’ 프로그램이다. 이야기도 ‘서프라이즈’하지만 재연 방식은 더 ‘서프라이즈’하다. ‘서양인’이 등장할 때는 가족을 잃어버린 미국인이든 2차 대전 와중의 독일인이든 ‘영어’로 대화한다. 물론 ‘재연’하는 배우가 외국인이라고 모두 영어에 익숙한 것은 아니다. 어떤 배우는 통째로 대사를 외워버린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프로그램 관계자는 서양인을 표현하는 데 ‘영어’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시청자도 여기에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

(윤지관 책임편집, 당대 펴냄, 1만5천원)는 ‘영어’를 주제로 등에 발표된 글을 모은 것이다. 1부 영어가 어떻게 우리 사회를 구성해왔나, 2부 영어 교육과 그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가, 3부 영어의 지배가 강화되는 현실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나뉘어 있다.

1999년을 기점으로 대학 영어는 교양영어 대신 실용영어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들이 가르치고 배우려는 영어는 셰익스피어, 밀턴, 흠정성서의 영어가 아니라 보따리장수에서부터 거대한 다국적 기업인들까지 온 세상 장사꾼들이 쓰는 세계 공통 직업영어”(김진만)다. “이러한 필요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아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시장의 개방화, 안으로 노동시장의 유연화의 소용돌이 속에서”(이승렬) 전개됐다.

영어 열풍의 한가운데는 ‘조기교육’이 있다. 그런데 영어교육과 교수는 “조기 영어 교육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결정적 시기 가설’을 우리나라 현실에 적용한 것은 일반화의 오류”(이병민)라고 말한다. 결정적 시기 가설은 영어를 매일 상용하는 국가에 언제 이민을 갔느냐의 문제로 영어에 노출되지 않은 환경에서의 효과를 검증한 논문은 한 편도 없다는 것이다.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우려도 이 책의 화두다. 1998년 복거일이 ‘영어모국어화’의 전 단계로 ‘영어공용(公用)화’를 내놓은 뒤 보수신문이 찬성에 발을 담그고 논쟁을 이끈 때로부터 한참이나 지났지만 이 주장은 끈질기게 살아 있다. 쓰는 사람도 없는 언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이 해괴한 발상은 일본에서도 있었다. 일본은 2000년 한 정부의 자문기구는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발표를 했다. 이연숙은 이 주장이 ‘모어 페시미즘’, 즉 심층의식 속에 일본어를 저주하고 있기 때문에 나왔다고 말한다. 공용화론 이면에는 ‘침략적 민족주의’가 있다. 공용화론 주창자 정과리는 “세계 체제 속에서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자”고 말한다. 여기에 대한 반론. “정한론이 제국주의 시대의 정치학이었다면 영어공용화론은 제국시대의 정치학이다.”(이승렬)

전직 영어학원 강사 더글러스 루미스(일본 쓰다대학)의 체험담은 흥미롭다. 그는 영어학원에서 배우는 내용이 미국 문화의 빈곤성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영어회화 학원으로 잡아끄는 이유가 바로 이 끝없이 계속되는 약방, 슈퍼마켓, 드라이브인 영화관, 햄버거 매장 이야기들 때문이라면 이거야 참으로 낯간지러운 일이 아닌가?” 영어학원에서 배우는 무의미한 문장들(“I have a book.” “I have a pencil.”)은 ‘실어증’과 비슷하다. 문장 변환은 “학식과 추진력, 돈, 용모, 여자친구, 젊음, 야망 등 바로 자본주의 미국에서 한 인간의 성공조건들을 죽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영어가 유창한 미국인은 대한민국에서 원어민(native speaker)이다. 윤지관은 마지막 글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프란츠 파농의 을) 시인 고 김남주는 제목을 이라고 바꾸어 출판하였다. …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닌데 자신의 땅에서 스스로를 이산의 올가미에 빠뜨리는 것이야말로 은밀하게 진행되는 식민화 과정의 한 극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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