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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유럽과 중국의 어색한 만남

등록 2007-03-16 00:00 수정 2020-05-03 04:24

스펜스의 색다른 역사서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1722년 1월, 중국 광저우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장프랑수아 푸케 신부의 거대한 야망이 무르익고 있었다. 그는 중국 고전들의 기원이 가톨릭의 하나님이라고 보고, 유럽에 이 엉뚱한 발견을 전파하려 했다. 문제는 책의 필사를 도울 중국인 조수를 찾는 일이다. 애가 닳던 푸케는 요한 후라는 중국인을 찾아낸다. 후는 교육받은 학자는 아니었으나 가톨릭 교인이었고 문맹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김복미 옮김, 서해문집 펴냄, 1만2천원)은 미국의 비교적 균형 잡힌 중국사학자로 평가받는 조너선 D. 스펜스가 쓴 작은 책이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온갖 사료들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사실들을 재배치해 소설 같은 역사서를 쓴다. 책은 소설보다 흥미진진하고 위트가 넘친다. 읽다 보면 스펜서라는 학자의 글쟁이로서의 능력에 놀라게 된다. 그가 책에서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 문제,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추측하기 전에, 두 사람의 여정을 살펴보자.

항해가 시작되자 푸케는 달콤한 행복감에 젖었으나 슬슬 불안의 징조에 휩싸인다. 그 불안의 대부분은 후에게서 나온 것이다. 후는 선원과 싸움을 벌이고 전투 중에 혼자 단검을 공중에 흔들며 갑판을 돌아다녔다. 푸케는 육지에 상륙하면 후도 진정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1722년 8월, 푸케는 프랑스 포르루이에 상륙해 후와 함께 한 관리의 집에 머문다. 파리를 거쳐 바티칸 교황청으로 갈 계획이었다. 중국 서적의 통관을 위해 푸케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닐 때, 후도 못지않게 바빴다. 그는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에서 매트리스를 끌어내려 바닥에 놓고, 가정부와 식사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무 말 없이 마당에 있는 손님의 말을 타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포르루이를 떠나지 않겠다는 후를 억지로 설득해서 역마차에 태웠을 땐 수시로 뛰어내려 과일을 훔쳐먹고 거지에게 자신의 고급 조끼를 벗어주었다. 물론 그 옷은 푸케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후는 거지가 돼서 프랑스를 횡단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해 10월3일 푸케는 이런 심경을 털어놓았다. “저는 데려오지 말았어야 할 중국인과 같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포르루이에서 낭트를 거쳐 파리로 갔다. 1722년 11월, 후는 길을 잃고 새벽 3시에 야경대에 잡힐 때까지 파리를 헤매고 다녔다. 스펜스는 후가 새벽 3시까지 어떤 것들을 보았을지 추측해본다. 당시 야경대의 기록에 보면 성매매 아동, 자살 미수자, 주정뱅이, 온갖 실업자들이 체포되곤 했다. 스펜스는 후가 처음엔 찬양해 마지않던 파리의 이면을 보았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파리에서도 후는 계속 구걸하며 프랑스를 돌아다니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에겐 ‘남녀분별’이라는 한자어를 쓴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면서 생 폴 성당까지 행진하는 습관도 생겼다.

푸케가 교황청으로 떠나야 할 날이 되자, 이제 학자에서 ‘병자’로 전락한 후는 절대 로마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1723년 4월15일 마침내 후는 유럽의 마지막 안식처에 보내졌다. 그곳의 이름은 ‘샤랑통 정신병원’이다. 프랑스 당국, 로마 교황청, 푸케 신부 중 누구도 그의 치료비를 지불하지 않자, 병원은 그를 ‘적선 대상 환자’로 분류했다. 이 적선 대상 환자들이 받는 처우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만 먹고, 얼어죽지 않을 정도만 입는 것이었다. 1725년 8월10일 석방된 후는 송장의 몰골이었다. 그는 통역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제가 왜 감금돼 있었죠?”

이것은 유럽 문명과 중국 문명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푸케 신부의 출발점은 중국 고전의 사상을 가톨릭에 포섭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태도도 사상처럼 오만했다. 그와 유럽인들은 낯선 중국인이 철저히 유럽 문명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단 한 번도 후와 진지하게 대화하지 않았다. 이것이 유럽의 ‘합리성’이다. 이런 타자에 대한 몰이해는 역사로 이어진다. 푸케는 중국인의 잘못된 행동과 자신의 올바른 조처에 대해 세밀한 기록을 남겼다. 결국 승자는 푸케다. 그러나 후도 고향 마을에 돌아가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서양이란 비열한 곳은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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