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연대와 선동의 시대를 돌아보는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1980년부터 시대를 10년 단위로 나누고, 그 시대의 소설 중 대표작들을 골라 실은 재미있는 책이 나왔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소속된 민족문학연구소가 작품을 선별해 (1만2천원), (1만2천원), (1만4천원)로 나눠 묶었고, 생각의나무가 펴냈다. 머리말이 밝히는 기획 의도는 이렇다. “소설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그리고 그 연속성 속에서 끊임없이 변전하는 우리의 현재를 함께 읽어보자. …지금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했다.” 작품의 주요 선정 기준은 시대적 대표성이고, 현재에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를 중심으로 한다는 기준이 더 부가됐다.
세 권의 책 중에서 만 살펴보자. 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1984), 방현석의 ‘내딛는 깃발은’(1988), 김인숙의 ‘함께 걷는 길’(1988),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1987)가 묶여 있고, 작가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2002),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2002), 정도상의 ‘함흥·2001·안개’(2006)가 추가됐다.
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는 지역신문에 만화를 연재하는 한 소시민의 이야기다. 그는 정보기관에 끌려갔다 온 뒤 독가스 냄새에 괴로워한다. 그는 결국 직장까지 그만두고, 끊임없이 광주에서 죽은 시민들의 환영을 본다. 작품 전체가 리듬감 있는 독백으로 구성된다. 환영, 환청, 정신분열은 권력에 용해되지 못하는 소시민의 내면을 드러낸다. 방현석의 ‘내딛는 깃발은’과 김인숙의 ‘함께 걷는 길’은 노동문학이다. ‘내딛는 깃발은’은 패배적인 상황에서도 회사의 만행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 그런 전위적인 노동자들로 인해 각성되는 일반 노동자들의 모습이 극적으로 구성돼 있다. ‘함께 걷는 길’ 역시 마찬가지인데, 여성을 주체로 내세운다. 남편의 투쟁에 동참하게 되는 노동자의 아내들을 그리고 있다.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는 그 시대 특유의 (굳이 이름 붙이자면) ‘감방 문학’이다. 민주화 투쟁으로 옥에 갇힌 학생들은 감옥 안에서도 불합리한 교도 행정과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다. 여기에서도 광주 얘기는 빠지지 않는데, 진압군으로 참여해 상관이 동생을 쏴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던 죄수는 점차 학생들의 투쟁을 이해하게 된다. 김하기의 같은 작품과 겹치면서도 다르다.
작가들의 2000년대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묘하게도, 세 작품 모두 주인공들이 한국이라는 경계 바깥에 서 있다(혹시 이들은 베트남·중국·북한에 있는 게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80년대로 돌아간 게 아닐까).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에서 주인공은 베트남에 있다. 그는 호찌민 루트의 전사였던 영화감독의 가르침을 통해 80년대의 동지와 화해하고 있다.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는 한때 동지였으나 지금은 일중독에 걸려버린 남편을 떠나 중국에서 혁명의 상처를 확인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정도상의 ‘함흥·2001·안개’는 중국으로 인신매매당하는 한 북한 소녀의 수난을 다룬다.
그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사람들은 당시의 문학이 목표를 뚜렷하게 가지고 있어야 했다고 회고한다. 따라서 문학은 ‘깨어난 자들’의 생산품이고, 선동이란 방식으로 유통됐다.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맹렬하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본 원칙들을 수용했다. 따라서 80년대 문학은 빈곤했으며, 그 빈곤은 자처한 것이다. 그것이 ‘온몸의 헌신’이었음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80년대 문학을 돌아보는 방식이다. 책의 기획 의도엔 어떤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그것은 80년대를 거쳐온 지식인들이 느끼는 시대와 문학의 위기다. 책의 해설은 매우 겸손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80년대 문학의 인식과 열정을 웅변하고 있다. 80년대를 경험하지 못한 독자로서 딱 한 가지 의문은 던져볼 수 있겠다. 이 책이 80년대를 돌아보는 태도는 재발견이 아니라 ‘향수’가 아닐까. 과거에 대한 찬사와 변론이 현재의 위기에 대응하는 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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