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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우리의 값싼 낭만에 대하여

등록 2007-02-03 00:00 수정 2020-05-03 04:24

근대 예술과 삶을 지배하는 키치에 대한 반격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로 놀라운 해박함과 독서 편력을 보여줬던 조중걸 교수가 (프로네시스 펴냄)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묵직한 문체로 현대사회의 키치에 대해 매우 독창적인 성찰을 하고 있다. 조 교수는 키치를 단순한 ‘그림 쪼가리’가 아니라 근대 이후 우리 삶의 태도와 세계관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근대 이후 예술사와 철학사를 키치에 대한 다양한 작용과 반작용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키치란 무엇일까. 지은이의 비유를 빌리면 키치는 고전예술과 통속예술 사이에서 ‘양의 탈을 쓴 늑대’(고급예술의 탈을 쓴 저급예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전예술은 감상을 위해 상당한 양의 교양과 긴장을 필요로 한다. 좋은 예술일수록 거짓 기만이나 타협을 하지 않고 진실을 보여준다. 반면 통속예술은 가장 저급한 현실 도피이고 오직 소비를 위한 문화이다. 산업혁명 이후 탈진할 정도의 노동시간에 짓눌린 시민들은 싸구려 감상을 통해 숨을 돌렸다. 키치는 위선적인 통속예술이다. 싸구려 감상에 호소하면서도 고급예술에서 한자리를 요구한다.

고급예술이 작품과 독자의 직접적인 만남을 전제한다면 키치는 작품과 독자 사이에 ‘환상’이 끼어든다. 예컨대 음악이 그 자체로 감상되는 게 아니라 헤어진 옛 애인과의 추억을 상기시킨다든지, 어떤 그림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떠올린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것을 지은이는 키치가 불러내는 ‘이차적 눈물’이라 부른다. 키치는 이런 식으로 작품과 독자를 직접 대면시키지 않는 이중적 예술이다. 키치의 가장 큰 해악은 현실 옹호적이라는 점이다. 키치 안에서 세계는 늘 조화롭고 통일적이다. 키치는 대중들이 실존과 불안을 직시하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세계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이것을 슬로건으로 표현하자면 “아아, 인생은 아름다워라”이다. 지은이는 프랑크푸르트학파보다 훨씬 과격한 대중문화의 적이며, 키치문화의 고발자다.

키치는 지극히 근대적인 예술이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예술에서만큼은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제 자아실현은 소비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예술은 대중에게 불친절하며 고도의 집중력과 몰입을 요구한다. 그러나 키치는 편안하고 달콤한 예술이다. 혹은 대중의 슬픔이나 우울을 싸게 팔아먹는 시큼한 예술이다. “키치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 즉 프티부르주아적인 것이다.”

근대적 이성의 파탄은 키치를 번성시키는 토양이다. 신을 ‘불가지’의 영역으로 추방한 이성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함께 몰락했다. 합리적 세계라는 신념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키치는 이런 절망의 토양에서 자라났다. 키치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나와 세계의 화해를 주선한다. 거짓된 위안, 달콤한 사탕발림, 위선의 낙원…. 키치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 다만 실재하는 척할 뿐이다. 이 시대에 키치는 예술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사물들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상품의 사용가치와 아무 상관없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상품광고들, 온갖 양식들이 비빔밥처럼 병렬된 강남의 건축물들, 고객을 헛된 꿈으로 인도하는 백화점 등이 그것이다.

지은이가 제안하는 키치의 개념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지은이를 따라 좀더 복잡하고 내밀한 예술사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키치에 저항하는 다양한 근현대 예술사조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의 인습성과 구태의연함, 자기만족, 부르주아적 허위의식 등에 내재한 키치적 요소들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했다. 현대미술의 기하학주의는 키치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가식적 진지함을 벗겨내려 한다. 인상주의자들은 인습으로 굳어진 시각상을 해체한다. 인상주의는 부르주아들이 세워놓은 가치의 전복이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의 혹독한 반발에 직면해야 한다. 지은이의 논의는 키치를 해체하고 넘어서려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기법들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넘어서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가 있고, 자신을 부정하는 예술인 메타픽션과 실체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네오리얼리즘 등이 있다. 후반부의 복잡한 논의에 길을 잃은 독자라면 지은이가 서두에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는 게 좋겠다. “언제까지 값싼 거짓 낭만과 삶의 역겨운 기만적 행복 속에 몸을 담그고 있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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