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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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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주의 기원

등록 2005-10-07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학민/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 지은이 hakmin8@hanmail.net

폭탄주의 유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20세기 초 가난한 미국의 부두 노동자들이 적은 돈으로 빨리 취하기 위해 싸구려 위스키와 맥주를 혼합해 마신 게 시초라고도 하고, 같은 시대 러시아의 벌목공들이 시베리아의 강추위를 이기기 위해 보드카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것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미국의 한 술집 주인이 손님이 마시다 남기고 가버린 맥주와 위스키를 한 잔에 모으다가 우연히 마신 데서 폭탄주가 시작됐다고도 말한다. 어찌됐든 미국의 입말에 ‘맥주를 섞은 위스키’를 보일러 메이커(boiler maker)라고 하는 데서도 보듯이, 폭탄주는 탄광·부두·벌목장 등에서 힘들게 일하던 노동자들이 싼값으로 빨리 술에 취하려던 ‘천한 술 문화’였음이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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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미국의 천한 술 문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권력을 쥔 고귀한 분들의 음주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국감을 마치고 한나라당의 주성영 의원 등 국회의원들과 검사들이 모여 폭탄주 파티를 벌이다 술집 여주인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성희롱을 한 지난 9월27일의 ‘사건’도 폭탄주 문화의 질긴 뿌리를 확인시켜준다. 흔히 폭탄주를 군사문화의 잔재, 죽음을 부르는 극한의 음주법으로 여겨 척결의 대상으로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군대나 검찰 등 상명하복이 투철한 권력기관에서는 폭탄주를 돌리는 술자리가 계속 남아 있다. 여기에 국회의원들과 고위관리, 언론 종사자들이 참여하고, 이제는 기업의 간부들로 그 문화를 확대해갔다. 곧 미국·영국의 노동계층에서 시작된 폭탄주가 우리나라에서는 부르주아지 권력층의 한 상징으로 자리잡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도착적 현상이다.

권력을 분류하자면, 첫째 카리스마로 이야기될 수 있는 개인적 권력이 있다. 두 번째는 설득력으로, 한 개인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내는 수단으로서의 권력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벌이는 상황을 통제하는 전략적 또는 조직적 권력이다. 네 번째로는 어떤 상황 안에서만 작용하는 권력이 아니라 그 상황 자체를 조직하고 지휘하는 권력이 있다. 이 중 네 번째 권력은 사회적 에너지 흐름의 분배와 방향을 강제하고, 정치와 경제를 구조화하는 권력인바, 이들은 자기들만의 권력행위의 장을 형성하고, 그럼으로써 어떤 종류의 행동은 가능한 것으로 용인하고, 또 다른 행동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한다. 우리 사회의 군, 검찰, 국회의원, 관료, 기자 등 이른바 파워 엘리트가 그들이다.

그런데 왜 이들이 모이면 항시 폭탄주일까? 첫째, 이들은 권력을 공유한 자로서의 일체감을 갖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빨리 사라지도록 적당히 취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이들은 권력 내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항시 따돌릴 생각을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폭탄주를 끊임없이 돌림으로써 주량이 약한 경쟁자의 몰골을 흐트러뜨린다. 셋째, 권력을 독점한 그들만의 특권의식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기 위해 값비싼 위스키나 브랜디를 마구 섞어 마시는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넷째, 이들은 호쾌·호방한 남성성(사실은 가부장적 권위주의)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이를 위해 평등을 가장해 부하들이나 술집 여종업원들에게까지 막말을 하고 음주를 강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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