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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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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박물관 리쿼리움

등록 2005-09-01 15:00 수정 2020-05-02 19:24

▣ 김학민/ 지은이 hakmin8@hanmail.net

중세를 뒤흔든 7차례의 십자군 원정(1096~1270)은 투르크족의 지배하에 있던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이라는 원정 목적은 실현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동서양간 교통과 무역의 활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이후 양 문명의 교류와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십자군 원정은 ‘술의 역사’에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했다. 곧 액체를 가열해 증기로 만들고, 그것을 식혀서 원래의 액체 속의 성분을 분리하거나 정제한 액체를 만드는 증류법이 아라비아에서 유럽으로 전래된 것이다. 그러나 증류법은 원래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닷물을 증류해 소금기를 제거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고, 이러한 그리스 과학 발전의 산물들은 7세기부터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유대교와 기독교 의사들, 페르시아 사산왕조 시대의 네스토리우스 학파들에 의해 아라비아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비아에서 전래된 증류법은 온갖 화학물질들을 나누고 섞고, 끓이고 태우고 하여 금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중세 연금술사들을 크게 흥분시켰다. 이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과학적’ ‘비과학적’ 실험을 해왔지만 금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는데, 이제 증류법이라는 새로운 과학기술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주위에 있는 모든 액체들을 증류해보는 과정에서 당시 사람들이 즐겨 마시던 포도주를 증류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로써 연금술사들은 술의 주성분을 파악하게 되었고, 이 성분을 의학 라틴어로 ‘알코홀’(al’kohol)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6세기 스위스의 의사이자 연금술사인 파라셀수스였다. 그러나 ‘알코올 증류법’이 바로 술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신비스러운 용액은 약으로만 사용됐던 것이다. 연금술사와 수도사, 이발사, 의사들은 앞다퉈 자신만의 비법으로 증류를 해서 신비의 묘약이자 무병장수의 약을 최고의 용매제 또는 방부제로 이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증류주로서 위스키, 브랜디가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16세기까지 알코올은 약제상들만이 취급할 수 있었다.

고대로부터 술은 신이 내려준 음료로 인식돼왔다. 움푹한 돌 위에 떨어진 과일이 발효된 액체를 인간이 우연히 마시고 기분이 좋아 즐거워하며 신을 찬미하고 그를 기리는 데 바쳤던 것이다. 포도주, 맥주, 기타 곡식을 발효시킨 발효주들의 알코올 함유량은 그 원료가 되는 식물의 설탕 함유량과 동일하다. 곧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적정 알코올 양(도수)은 순수 발효주 알코올 도수의 임계치 15도 전후가 아닐까 생각하면, 발효주를 증류해 근 10배의 알코올을 함유하도록 제조된 증류주는 신의 굴레를 벗어난 인간의 도전일 수도 있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공원에 가면 발효주에서 증류주로 발전하는 ‘술의 역사’를 모두 알 수 있는 술박물관 ‘리쿼리움’(043-855-7333)이 있다. 입구를 장식한 대형 위스키 증류기를 비롯해 코냑 증류기, 포도 압착기, 오크통 제조기 등 옛 ‘기계식’ 양조설비들이 볼 만하다. 와인, 맥주, 동양 전통주의 제조방법과 라벨, 오프너, 스크루, 고대 이집트에서 중세 이탈리아까지 포도주를 담는 용기로 사용했던 암포라, 병, 주전자, 잔 등 5천여점의 전시물들이 동서양의 술에 얽힌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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