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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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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의 기원

등록 2005-08-26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학민/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 지은이 hakmin8@hanmail.net

서양의 술집은 가정에서 출발했다. 중세의 가정들 중에는 집에서 직접 빚은 맥주나 포도주가 남아 있으면 나그네에게 적당한 대가를 받고 팔았다. 나그네에게 팔 술을 가지고 있는 가정은 집에 긴 장대를 걸어놓고 그 끝에다 땔나무 묶음이나 빗자루, 또는 화환을 걸어놓아 ‘영업 중’임을 표시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초기 농촌 사회의 교환경제가 화폐경제로 차츰 이행하게 되었고, 이로써 고래의 손님 접대 방식이 크게 바뀌게 되어 본격적인 접객업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접객업은 숙박, 식사 제공, 술 판매의 세 가지 서비스를 주로 하게 되지만, 나중에는 지역에 따라 한 지붕 아래서 매춘업까지도 겸하게 되었다.
최초의 접객업이 잠자리, 음식, 술 등 주인의 식구들이 쓰고 남은 것들을 나그네에게 대가를 받고 이용하게 했던 것인 만큼, 술집의 홀은 주인집의 부엌이었다. 부엌은 음식을 준비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주인과 가족, 그리고 나그네들의 사회적 삶이 전개되는 다목적 공간이었다. 여기에서 나그네는 주인의 가족공동체로 받아들여진다. 달리 말하면, 나그네는 머무는 동안 잠자리, 식사, 술을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이 있을 뿐 주인의 가족에 속했다. 부엌에 머무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든 그렇지 않든 간에 다른 사람을 이야기에 끌어들일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또 말을 걸어오면 응답해주어야 할 ‘의무’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접객업이 더 상업적으로 운영되면서 홀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고, 원래의 사사로운 부엌의 이미지는 사라져버렸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홀(부엌)은 주인의 사적 공간에서 완전히 해방돼 손님들에게 직업적인 서비스가 제공되는 영업장소로 정착됐다. 홀에 남겨진 유일한 부엌의 흔적은 벽난로와 장식용으로 걸어놓은 그릇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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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는 긴 널판(카운터)으로 주인의 공간과 나그네의 영역을 나누는 술집인 바(Bar)가 등장했다. 바가 19세기 초 영국의 대도시에 출현했다는 것은 그것이 산업혁명의 한 상징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 시기에는 산업혁명에 힘입어 발달된 증류법으로 위스키와 브랜디 등 독주가 술 시장을 완전히 지배했다. 바는 이러한 독주를 위한 술집이었다. 독주는 높은 알코올 도수 때문에 빨리 취하게 하고, 바는 술 마시는 사람이 술집에 머무는 시간을 아주 짧게 줄이게 했다. 산업혁명에 동원된 노동계급이 값싸면서도 독한 술을 급히 마시고 빨리 다시 노동에 투여하는 데 편리하게 고안된 것이 카운터를 설치한 바였던 것이다.

요즘 우후죽순으로 생긴 ‘와인 바’들은 ‘바의 역사’에 비쳐보면 좀 생뚱맞다. 와인은 기호품으로서의 ‘술’이 아니라 식사 과정에서의 ‘음료’로 여겨진다. 와인은 독주가 어울리는 바보다는 홀에서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들 때 맞는 음료이기 때문에 ‘와인 바’라는 것이 생뚱맞은 것이다. 내가 사는 용인시 상현동에 아주 분위기가 좋은 바가 하나 있다. 젊고 품격 있는 여주인 조남경씨가 운영하는 ‘反’(031-272-0245)이 그 집인데, 9평 면적에 카운터가 절반을 가르고 있으면서 손님 의자는 달랑 8개다. 주인의 장사를 생각하면 19세기 영국 바처럼 카운터에 앉는 둥 마는 둥 위스키 한잔 목에 탁 털어넣고 빨리 나가야 하는데, 누구도 50cm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여주인과 나누는 알콩달콩 세상살이 이야기에 엉덩이를 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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