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판결’은, 언젠가 돌아올 좋은 판결의 디딤돌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였던 한혜경(36)씨의 어머니 김시녀(58)씨는 아직 그렇게 믿고 있다. 딸 혜경씨는 1996년 19살의 나이로 삼성전자에 입사해 경기도 용인 기흥공장에서 액정표시장치(LCD)를 만들었다. 납땜 일을 하던 딸은 입사한 지 3년째 되는 해부터 생리를 하지 않았다. 눈이 어두워지고 차츰 말라갔다. 망가진 몸으로 6년 만에 퇴사한 그는 2005년 뇌종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됐다. 1급 지체장애인이 된 한혜경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에서 지난해 12월 법원은 선고했다. “납 등 유해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정만으로 뇌종양이 재직 중 업무로 발병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서울행정법원 행정4단독 정재우 판사)
원인 나올 때까지 법원은 손 놓아야 하는가
정 판사가 판시한 대로 “뇌종양은 현대 의학상 발병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유해물질 노출로 인한 뇌종양이 산업재해로 인정된 전례도 없었다. 법원의 판결에 대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무거운 병임에도, 정부와 법원이 병의 분명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을 (산재) 인정의 근거가 아니라 부정의 근거로 이용한 겁니다. 반도체 노동자들 가운데 뇌종양을 앓는 이들이 반올림을 찾아온 분들만 20명입니다. 백혈병 피해자에 이어 두 번째로 피해자가 많습니다.”
지난 11월, 서울행정법원 행정7단독 이상덕 판사는 전혀 다른 판결을 내놨다. 이 판사는 삼성전자 충남 아산 온양공장 반도체 노동자로 일하다 2012년 뇌종양으로 숨진 이윤정(34)씨의 남편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에서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발병의 원인과 기제가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원고들이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유해 화학물질, 극저주파 자기장, 주야간 교대근무 등과 같은 작업 환경상의 유해 요소들에 일정 기간 지속적·복합적으로 노출된 후 뇌종양이 발생하였으므로, 이러한 질병의 발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백혈병에 이어 뇌종양이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으로 처음 인정된 것이다.
법원은 기존 산재 판결에서 한발 나아갔다. “특정 화학물질과 질병 사이의 관련성이 아직 연구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관련성이 없다 또는 낮다는 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 이종란 노무사는 “뇌종양을 인정함으로써 직업병의 영역을 확장했을 뿐 아니라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관련성이 없다고 해선 안 된다’고 명시함으로써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 싸우는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희망을 열어준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다음 사람을 위한 디딤돌이었다 생각해요”
한혜경씨의 어머니 김시녀씨도 그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우리가 앞서 뇌종양 산재 인정을 위해 싸워왔고 그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음 사람을 위한 디딤돌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김씨는 반가운 소식을 딸 혜경씨에겐 아직 말하지 못했다. 지난 8월 항소마저 기각당했기 때문이다. 수술 후유증으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혜경씨는, 속 시원히 울지도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었다. “이번 판결 덕분에 앞으로 대법원에서는 더 나은 판결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돼요. 법원 앞에 저울이 왜 있겠습니까. 부디 그 저울에 맞게끔 판단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의 좋은 판결이 또 다른 좋은 판결로 이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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