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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치긴 부족한 ‘최고의 판결’

헌재 만장일치 ‘대통령 파면’ 결정에도 촛불에 떠밀린 수동적 선택 ‘아쉬움’ 남아
등록 2017-12-19 17:15 수정 2020-05-02 19:28
은 매해 말 그해의 주목해봐야 할 ‘올해의 판결’을 선정해 기본권과 인권을 용기 있게 옹호하는 판결을 내린 판사(재판관)들을 응원하고, 그 반대편에 선 판결들을 경고·비판해왔다. 2008년 시작된 ‘올해의 판결’은 올해로 벌써 10회째를 맞았다. 그동안 ‘올해의 판결’이 축적해온 기록은 한국 사법정의의 현재를 가늠하는 흔들림 없는 지표로 자리잡았다.

헌법재판소에서 3월10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을 내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헌법재판소에서 3월10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을 내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피청구인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

2017년 3월10일, 오전 11시21분. 이정미 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입에서 떨어진 이 ‘최종 선고’는 한국 사회를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게 할 수 없다는 헌법재판소의 결단을 드러낸 말이었다. 보수 성향의 헌법재판관까지 아우른 8 대 0의 전원일치 결정으로 박 대통령의 파면은 한국 사회 모두의 염원을 아우른다는 도덕적 명분과 법적 정당성까지 획득할 수 있었다.

최고의 판결 선정 망설인 이유

그러나 ‘올해의 판결’ 심사 과정에서 이 역사적인 대통령 파면 결정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심사위원 누구도 이 결정이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냈다는 데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특히 재판관 만장일치로 파면 결정을 내려 이후 벌어질 혼란을 막았다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헌재 결정이 7 대 1이나 6 대 2로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다. 보수적인 재판관도 모두 대통령 파면에 동의해 헌재 결정에 대한 불복 여론이 숨쉴 공간을 없앴다고 생각한다.”(안진걸) “사법부라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체계 내에서 만장일치 탄핵 결정이 내려졌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노희범) 대통령 파면 결정에 대한 긍정적 평가들이다.

하지만 이는 촛불집회의 열기를 수동적으로 받아안은 선택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천만 촛불이 아니었으면 대통령 파면이 됐을까 의문이다.”(오지원) “대통령 파면을 최고의 판결로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박한희) 심사위원들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대통령 파면’ 결정을 선뜻 최고의 판결로 꼽기 망설였던 이유다.

실제 대통령 파면 결정문을 보면 아쉬운 대목들이 있다. 헌재 심판대에 올라온 대통령 파면의 쟁점은 총 7개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2016년 불거진 국정 농단과 관련된 항목이 3개다. 최순실의 국정 개입이 △공익 실현 의무에 위배되는가 △기업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하는가 △비밀엄수 의무에 위배되는가 등이다. 헌재는 이러한 쟁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을 어겼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공무원 임면권 남용 여부 △언론 자유 침해 여부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 여부 △불성실한 직책 수행이 탄핵심판 절차의 판단 대상이 되는가 등 나머지 4개 쟁점에 대해선 ‘탄핵 사유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과 ‘대통령의 7시간’으로 상징되는 불성실한 직책 수행과 관련한 판단이었다.

이에 대해 이정미 당시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해 어떠한 말로도 희생자들을 위로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라면서도 “세월호 참사 당일 피청구인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였는지 여부는 탄핵심판 절차의 판단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고 밝혔다. 이런 판단에는 모든 재판관이 의견을 함께했다. 다만 김이수·이진성 재판관은 결정문에 헌재의 이런 판단이 대통령이 직무 수행을 불성실하게 해도 된다는 기록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보충의견을 남겼다. 두 재판관은 별도의 보충의견에서 “대통령의 불성실 때문에 수많은 국민의 생명이 상실되고 안전이 위협받아 이 나라의 앞날과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므로 우리는 피청구인의 성실한 직책 수행 의무 위반을 지적”한다고 썼다.

여러 평가와 논란이 있지만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이 한국 사회의 변화를 상징하는 신호탄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헌재 결정보다 위대한 것은 지난겨울 거리에 나선 시민들이었다. “시민들이 위대했다.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시민들은 거리로 나갔다. 그로 인해 결국 국회는 탄핵소추안을 의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헌재가 대통령 파면 결정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시민의 저력이었다. 4·19 때처럼 직접 대통령을 끌어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거리에서 ‘대통령 퇴진’을 외치면서도 국회와 헌재의 기능을 존중하는 균형 감각을 보여줬다.”(안진걸)

한국 사회 변화의 신호탄

대통령 파면 결정은 여러 헌법기관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5월9일 새 대통령이 뽑혔다. 민의를 배반하는 대통령을 다시 선택할 수 없다는 시민들의 열망은 문재인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9월25일 ‘제왕적 대법원장’이라 했던 양승태 대법원장이 물러나고 그 뒤를 김명수 춘천지법원장이 이었다. 11월27일에는 대통령 파면 결정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보충의견을 냈던 이진성 재판관이 헌법재판소의 새 수장이 됐다. 탄핵이 없었다면 새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의 임명권자는 여전히 ‘박근혜’였을 것이다. 촛불이 사법부를 새롭게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공은 다시 사법부로 넘어갔다. 한국 사회의 기대는 크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사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오지원) “민·형사부를 분리해 각 영역의 전문성을 가진 판사가 재판하게 해야 한다.”(이석배) “서민들이 판사가 우리와 비슷한 정서를 가진다는 생각이 들어야 재판에도 승복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판사가 판결을 내린다는 불신이 커지고, 승복해야 할 것에도 승복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사법부가 약자들의 편에 더 서주었으면 좋겠다.”(안진걸) “판사들이 법정에 서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한지 알아주면 좋겠다.”(박한희)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들은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에 거리낌 없이 박수칠 수 없었다. 아직 화룡점정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 점을 찍어야 하는 것은 새로 탄생한 사법부다. 새 시대의 사법부가 시민의 편으로 거듭나는 것. 진짜 박수는 그때를 위해 아껴둔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심사위원 20자평


김태욱 이유는 석연치 않지만, 결정 자체는 역사적
김한규 헌법을 유린한 자는 누구라도 책임져야 할 것이다
노희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되살린 계기가 되다
박한희 광장의 촛불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정
안진걸 대다수 국민이 만들어낸 위대한 촛불혁명의 결과, 헌재도 멋졌어요~
오지원 역사적 결정이지만 천만 촛불이 없었다면?
이석배 결론만큼 결정 이유와 논거도 깔끔했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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