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의 앞물결은 이제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전라도 땅 신안군 하의도에서 시작되어 한국전쟁과 자유당 정권, 5·16 쿠데타와 유신독재, 광주항쟁과 사형선고, 망명과 가택연금, 6월 항쟁과 단일화 무산, 대통령 당선과 남북 정상회담을 거쳐 마침내 모든 물결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 최후의 안식처로 흘러 들어갔다. 외롭게 시작했으나 심산협곡을 거치며 세력을 이루었고, 세력을 이루었으나 때론 폭포가 되어 추락하고 때론 산을 감싸고 우회하면서 결국 원했던 자리를 다 채운 뒤 넘쳐흘러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물,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피와 눈물로 점철된 그의 역정은 역사가 되었고, 그가 겪은 간난신고는 전설이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8월18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맨 오른쪽),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 등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누가 뭐래도 김대중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반민주 독재정치의 상징인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이어지는 박해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씨줄과 날줄이 되었다. 대학 캠퍼스엔 위수령이 내려지고 시인 김지하가 신새벽 뒷골목에서 남몰래 민주주의를 쓸 무렵, 인혁당의 8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18시간 만에 사법살인 당하던 때 정치권에선 ‘김대중’이란 이름의 봉홧불이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다.
1980년 광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들어선 전두환 신군부도 이 봉홧불을 끄진 못했다. 전두환의 사법부는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사실상 국외 추방까지 했지만 민주주의의 횃불은 광야를 불사르듯 전국으로 번져갔다.
오늘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거의 대부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흘린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과다. 그런 점에서 6월 항쟁에 이르는 반독재 민주화의 선봉에 서온 김대중에게 우리 모두는 정치적 빚을 진 셈이다. 물론 민심과 현실은 냉혹했다. 김대중 대통령을 선출한 것은 민주화 이후 10년이 지나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중 정부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일궈낸 최대 성과 중 하나라는 역사적 평가가 변하진 않는다.
김대중 정부가 이룬 업적 중 가장 빛나는 것은 남북 정상회담과 6·15 선언으로 표현된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이다. 탈냉전의 시대에 세계 유일의 냉전의 섬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를 평화지대로 전환시키는 가교 역할은 김대중 대통령의 경륜과 철학 없이는 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의 진보정당운동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 앞장서 이룩한 민주화 시대에 이르러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진 빚이 적지 않다. 나 역시 1990년 청주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부터 바로 옆방에서 수감 생활을 한 김대중의 전설을 들으며 출소 뒤 진보정당 건설을 구상했다. 갓 출발하는 허약한 진보정당은 김대중의 평민당과 민주당으로부터 ‘채혈’당하지 않으려 몸부림쳐야 하는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그러한 진보정당조차도 1987년의 민주화 없이는 존립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 김대중 정부에 빚만 진 것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는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 타고 넘어서야 할 산이기도 했지만, 그 거대한 산 앞에서 진보정당운동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래 한국 사회가 되돌릴 수 없는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이후에도 민주 대 반민주의 낡은 대립 구도에 의존한 민주연합론은 사실상 진보정당 시기상조론, 아니 진보정당 무용론으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앞길을 막아왔다.
민주연합론이 낳은 비판적 지지는 비판 없는 지지로 전락했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진보정당운동에 나서겠다고 약속한 인사들은 민주정부의 기득권을 향유할 뿐 진보정당을 집권의 장애물로 취급하고 나섰다. 김대중·김종필의 DJP 연합이나 노무현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이 보여주듯이, 권력 경쟁의 정치공학만이 존재했을 뿐 진보정당 세력과의 파트너십은 단 한 번도 추진된 바가 없었다. 오히려 젊은 피 수혈론 등으로 인해 진보정치의 인적 자원은 민주정부의 낡은 취약점을 보완하는 데 차출당했을 뿐이다.
한편 여러 측면에서 김대중 정부와 그를 이은 노무현 정부는 1948년 이후 한국에 등장한 정부 중에서 가장 나은 정부라고 분명히 규정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 이래 한국의 민주주의는 빠른 속도로 정착됐으며, 남북관계 역시 획기적인 발전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정부 수립 이후 ‘가장 나은 10년’이 더 나은 정부를 창출해내지 못하고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맞서는 반동의 시대를 초래한 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의 그림자이며 한계가 아닐 수 없다.
가장 아쉬운 대목은 김대중 시대가 그 이후 시대를 예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는 사실상 ‘3김 시대’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민주와 독재의 오랜 대립 구도에 이어 한국 정치를 점철해온 것은 3김 시대였고, 지역주의에 기반한 이 대립 구도가 김대중 정부를 끝으로 막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 점에서 3김 시대는 2002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수명을 다하고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3김 이후 시대는 어떠한 시대여야 하는가? 한국 정치는 국민이 살아가는 방식을 놓고 정책 노선으로 다투는 진보와 보수의 새로운 대립 구도, 즉 선진국형 대립 구도를 중심으로 전개돼야 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정치 개혁과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제기한 것은 ‘포스트 3김 시대’를 내다본 포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여권 내부의 반발을 무력화할 정도로 의욕적으로 추진되진 못했다. 결국 3김 시대 이후에도 3김 없는 3김 시대가 과도적 현상으로 오늘까지 연장되고 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낳은 또 하나의 역설은 역사상 가장 나은 정부 아래에서 사회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김영삼 정부 이래 관철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총노선은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더욱 강력하게 추진돼 이 10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가 두 배로 늘어나는 결과까지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역대 정부 중 가장 서민적이고 친노동의 이미지를 갖는 정부 아래에서 그전보다 구속 노동자 수가 더 늘어나고 노동운동을 적대시하는 정책이 연이어 실현됐다.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도약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의 안타까운 서거를 겪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김대중·노무현을 넘어서는 일이다. 가장 소중했던 지난 10년의 성과 위에 발을 딛고 이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도약이 절실한 순간이다. 3김 없는 3김 시대의 막을 내리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까지 꽃피울 수 있는 정치 구도의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반대함으로써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전을 이룰 대안을 현실화함으로써 비로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전에서 나는 듣는다, 고인의 유언을. “나를 딛고 넘어서 가라!” 장강의 앞물결은 이제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바다가 되었다. 더 나은 삶, 더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은 이제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삼가 명복을 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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