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호주오픈에서 우승한 로저 페더러에 부여하는 스위스의 이미지…국적으로 선수의 특성을 구분짓는 위험한 습성은 왜이리도 끈질긴지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Swiss Quality’
호주오픈에서 등장한 응원문구다. 어딘가 시계 광고에 등장할 법한 문구가 지칭하는 주인공은 ‘당연히’ 로저 페더러. 2007 호주오픈에서 한 세트도 지지 않고 우승했을 뿐 아니라(1980년 프랑스오픈의 비욘 보리 이후 27년 만의 메이저대회 무실세트 우승), 25살에 벌써 메이저 타이틀 10개를 수집했을 뿐 아니라, 현재 세계 랭킹 1위일 뿐 아니라, 역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불리는 사나이 페더러다. 기술과 체력과 정신력이 삼위일체를 이룬 페더러의 플레이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스위스 (시계의) 품질을 닮았다는 말씀이렷다. 남아공 출신의 어머니와 스위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은 그렇게 테니스 하나로 스위스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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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국적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만, 국적으로 선수를 구분하는 일만큼 익숙한 일도 드물다. 국적성은 우리 안의 강력한 코드여서, 아무리 잊으려 해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알프스 소녀’ ‘독일 전차’ ‘러시아 마녀’ ‘태극 전사’, 너무나 익숙한 이름들 아닌가. 그런데 묘하게도 그렇게 국적성의 프리즘을 들이대면, 묘하게 선수가 설명되는 구석도 없지 않다. 신윤동욱 아저씨는 언제나 국적성을 상상하면서 선수의 호불호를 결정했다. 특히나 테니스 선수에 대해서.
세리나의 눈매에 서린 매서움
2007 호주오픈 여자단식 결승에서 세리나 윌리엄스의 눈매는 매서웠다. 아니 무서웠다. 하필이면 상대는 마리아 샤라포바, 러시아 백인 미녀와 근육질 흑인 선수의 대결이었다. 백호주의 코트에서 언제나 불이익을 당해왔다고 생각하는 세리나의 눈에는 근거 있는 매서움이 서려 있다. 때때로 눈매의 매서움은 (대부분 백인인) 상대 선수뿐 아니라 경기 심판, 심지어 관중석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2006 시즌을 부상에 시달리며 허송하고 랭킹 81위 선수로 돌아온 세리나는 예상을 뒤엎고 경기를 압도했다. 이겨도 이겨도 눈매는 풀리지 않았다. 매서움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적들아, 나의 플레이를 보렴!’ 샤라포바의 실력은 1위가 아니어도 소득은 1위로 만드는 세계를 향해 쏘아붙이는 항변 같았다. 물론 같은 흑인이라도 세리나의 언니인 비너스처럼 우아한 선수도 있으니 이것은 역시나 상상된 인종성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덧붙이면, 1990년대 이후 안나 쿠르니코바, 마리아 샤라포바로 이어지는 테니스 코트의 미녀들은 대부분 하필이면 러시아(넓혀도 동구권) 출신일까. 러시아 미녀에 대한 남성들의 판타지를 생각하면, 우연치고는 짜증나는 우연이다.
머나먼 80년대에도 국적성의 게임을 즐겼다. 누군가는 체코 출신 이반 렌들의 플레이에서 노동계급의 특성을 읽어냈다고 한다. 이반 렌들의 라이벌 존 매켄로의 악동 기질에서는 당연히 미국식 쇼맨십이 읽힌다. 라켓을 집어던지고, 심판을 ‘야리는’ 매켄로의 기질은 본인이 의도했건 아니건, 실력에 스캔들도 겸비해야 스타가 되는 미국의 풍토를 반영한다고 뒤늦게 분석한다. 신윤동욱 소년에게 렌들의 성실함보다는 매켄로의 드라마가 매력적이었다. 젊은 날의 앤드리 애거시도 라이벌 피트 샘프러스를 ‘원숭이’라고 조롱한 적이 있다. 호주오픈에서 어떻게 쳐도 페더러에게 당할 수 없으니 스스로 짜증을 내면서 라켓을 집어던지는 로딕을 보니까 매켄로가 떠올랐다. 매켄로-애거시-로딕, 잘생긴 아메리칸 아이돌의 혈통에 악동 기질이 면면히 흐른다고 하면 오버일까.
독일답고, 스웨덴스럽고, 아시아적인?
보리스 베커, 슈테피 그라프, 독일 남녀가 석권했던 90년대는 재미없는 시절이었다. 그들은 실제 독일 기계처럼 강력한 신체로 정확한 테니스를 구사했다. 동구권 출신인 모니카 셀레스가 슈테피 그라프와 경기를 하면, 내게는 ‘제국과 변방의 대결’이라는 판타지가 떠올랐다. 변방의 셀레스가 중심의 그라프를 이겨주길 바랐다. 독일 선수가 딱딱하다면, 스웨덴 선수는 명민하다고 상상했다. 어쩌다 스테판 에드베리가 월드투어 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는 한 줄의 기사를 읽고서 판타지는 근거를 획득했다. 책 읽는 테니스 선수라니, 정말로 스웨덴스럽지 않은가. 그들은 두뇌 플레이를 한다는 편견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다. 역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게 덧붙이자면, 제발 라파엘 나달 오빠는 원색의 셔츠 따위는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꾸만 스페인 에로영화가 상상된다.
마이클 창의 플레이를 사자성어로 풀이하면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되지 않을까. 상대가 아무리 강하게 공격해도 백만스물한 번 넘기다 넘기다 결국은 이긴다, 창의 스타일이었다. 중국계 미국인은 그렇게 상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공을 받아넘겼다. 작은 체구의 창은 빠른 발놀림과 끈질긴 리턴으로 아시아적 끈질김을 코트에서 보여줬다. 국적성의 위험한 게임은 이렇게 좀처럼 떨쳐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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