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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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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언니들의 계절

등록 2006-12-01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국 여자농구·중국 여자탁구·일본 여자배구에 넋을 뺐겼던 아시안게임의 추억…다가오는 2006년 도하 아시아경기대회에선 대만 여자배구 대표팀 응원해볼까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아시안게임’의 계절이 돌아왔다. 공식 명칭이 바뀌어 이제는 ‘아시아경기대회’로 쓰지만, 여전히 입말은 ‘아시안게임’에 익숙하다. 당연히 ‘팔육 아시안게임’ 때문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이후의 개최지를 모두 기억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한번 써보자 하면서 개최지를 써내려갔다. 90 베이징, 94 히로마시, 98 방콕, 2002 부산…. 어머나,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맞다. 94년과 98년이 아마도 ‘블랙홀’이 아닐까 싶었지만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다. 솔직히 방콕은 얼마 전 신문에서 읽어 기억이 났고, 94년까지도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의 여운이 남아서 국민적 관심이 높았던 덕택이 아닐까, 뒤늦게 추측해본다.

중공 미녀들의 마력적 서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86 아시안경기대회는 임춘애의 4관왕으로 기억되지만, 내게는 중국 여자탁구 선수들로 남아 있다. 다이리리, 허즈리, 자오즈민 같은 이름들. 당시 15살 ‘중딩’은 탁구에 각별한 애정을 품어서 대회가 열리기 몇 달 전에 여자탁구 단체전 결승을 예매해두었다. 다행히 북한이 참가하지 않은 덕분에 한국은 결승에서 중국과 만났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양영자, 현정화 선수는 기사의 관습에 따르면 ‘만리장성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중국에 패했다. 비록 한국이 졌지만, 중국 선수들은 이상하리만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특히 그들의 체육관 천장까지 토스를 던지는 스카이서브는 강렬한 한 컷으로 인상에 남았다. 어린 마음에 그들이 스카이서브를 할 때마다 중국 탁구 선수에 덧씌워졌던 ‘마녀의 마구’ 이미지가 떠올랐다. 특히 녹색 테이블의 마녀, 다이리리(혹시 허즈리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가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긴 스카이서브를 넣을 때마다 ‘마녀의 마구’는 현실로 현현한 듯 보였다. ‘마녀의 마구’라니 돌아보면 정말로 노골적인 차별의 언어였다. 그러고 보면, 당시에 그들은 중국이 아니라 ‘중공’ 선수였다. 역시나 중공의 마녀들은 강했다. 그들의 마구에 한국 선수들은 넋을 빼앗겨버렸다.

그래도 탁구는 세계 정상을 넘보는 종목이었으므로 86년 이후로도 주요 세계대회는 중계됐다. 1년에 한두 번 그들의 안부를 방송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대회인가 중계를 하던 해설자가 “다이리리가 쌍꺼풀 수술을 했다”고 전했다. 정말로 그의 눈은 변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대회에선 “그가 서양물이 들었다고 비판을 받아서 출전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말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펜싱의 남현희 선수가 쌍꺼풀 수술로 대표 자격 박탈의 징계 위기에 처하는 현실이 2006년의 대한민국이다. 당시는 한창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는데, 그는 개방의 물결에 휩쓸렸다가 억울하게 희생된 언니로 보였다. 물론 중국 탁구의 세대교체가 빠르니 저간의 정확한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일본 여자배구 코트 가득 “아! 아! 아!”

아시아경기대회가 올림픽보다 재미있는 이유는 여자농구 한-중전, 여자배구 한-일전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올림픽에서는 꼭 만난다는 보장이 없지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십중팔구 만난다. 키가 2m 넘는 중국의 거인들 진월방, 정하이샤가 코트에 등장하면 이제는 끝이다 싶었지만, 한국 언니들은 심심찮게 그들을 넘어서 중국을 이겼다. 일본 여자배구 선수들이 점수를 ‘먹고도’ 코트를 줄지어 돌면서, 심지어 서로 격려하는 미소까지 지으면서, “아! 아! 아!” 외치는, 끝없는 투혼은 무시무시한 ‘일본혼’의 현현으로 느껴진다. 전 종목을 통틀어 그토록 처절한 파이팅을 나는 아직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처절한 파이팅도 90년대 내내 한국의 언니들을 누르지는 못했다. 94년 히로시마,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일본에서 일본을 이기고 금메달을 땄다. 장윤희 선수의 전성기였다. 90년 베이징,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이 중국에서 중국을 이기고 우승했다. 한국 스포츠사에 길이 빛나는 승리였다. 이렇게 농구와 배구는 한·중·일 삼국지를 즐기는 101가지 방법 중의 하나다.

90년대 후반부터 “글로벌, 글로벌” 하면서 아시아경기대회에 대한 관심도 줄었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서 2002년 부산에서 다시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렸다. 이번에도 언니들을 만났다. 중국도 일본도 아니고, 북에서 온 언니들이었다. 이른바 “북한 미녀 응원단”으로 불렸던 언니들을 ‘스토킹’했다. 한 달 동안 취재의 명을 받고 그들을 쫓아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이름까지 외울 지경이었다. 무료한 나날에 잊혀지지 않는 하루가 있다. 소프트볼 경기장에서 모처럼 북한 응원단과 대화할 기회를 얻었다. 응원단을 ‘지도’하던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을 “조선여성협회 간부”라고 소개했다. 이름이 뭐냐고 묻기에 “부모성을 같이 써서 신윤…”으로 설명했다. 반응이 색달랐다. “조선의 미덕에 어긋나는 행위입네다.” 쩝, 할 말을 잃었다. 어느새 86년에서 2006년으로 20년이 흘렀다. 추억의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부디 파이팅하면서 살기를. 12월1일부터 도하의 추억이 시작된다. 이번엔 대만 여자배구 대표팀을 응원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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