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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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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친구들’이니까 괜찮아

등록 2006-12-14 00:00 수정 2020-05-03 04:24

역경 극복 드라마와 남·북·일 동시 금메달로 가슴 뭉클한 도하…타이 국민영웅도 몰라봐 미안했지만, 어쨌든 우린 아시아 친구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자꾸만 눈물이 나는지. 그들을 보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세상에는 훌륭한 사람이 참으로 많다, 새삼 깨닫는다. 아시아경기대회 메달리스트들의 사연을 보면서 오늘도 눈물에 젖는다. 정구 여자단체전 결승, 경기를 잃을 ‘브레이크 포인트’까지 몰렸다가 4 대 3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던 김경련 선수. 스무 살의 김경련에게는 청각장애인 어머니,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가 있단다. 그가 입술에 힘을 주며 “저희 부모님이 정말로 고생 많이 하셨거든요”라고 말할 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아마도 2006 도하 아시아경기대회는 “아이! 아이!” 외치던 김경련의 파이팅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렇게 태극마크에 역경 극복을 더하면 자동으로 뭉클해지는 ‘개발시대의 정서’는 아직도 내 안에서 강력하다.

김경련의 야무진 파이팅이 있다면, 박태환의 상큼한 살인미소도 있다. 얼굴에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박태환이 금메달 시상대에 올라 환하게 살인미소를 ‘날릴’ 때, ‘한국 정말로 좋아졌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의 웃음은 콤플렉스 없는 사람이 짓는 자연스러운 미소다. 역경을 극복한 눈물이 국민의 가슴을 적신다면, 티없는 웃음은 보는 이조차 웃게 만든다. 박태환의 미소는 그렇게 미래형이다. 역경 극복의 드라마와 콤플렉스 제로의 미소, 이렇게 도하에서도 ‘다이내믹 코리아’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전시된다.

"한국이 져도 북한이 이기면 되지"

한반도의 비동시성도 있다. 가난한 이웃을 더욱 연민하게 되듯이, 북한 선수들에게 더욱 정이 간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저렇게 하다니 정말로 장하다, 웃지도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지만 아시안게임의 계절에 분단이 슬픈 일만은 아니다. 물론 분단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남북 대결의 강박이 지워진 시대에 어쩌면 우리는 두 개의 대표팀을 가지는 호사를 누린다. 북한 축구팀이 일본을 눌렀을 때 느끼는 기쁨은 한국이 이겼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아닌가?). 한국이 져도 북한이 이기면 되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랴. 15.375점. 5일 남자체조 안마 결승에서 한국의 김수면에 이어서 북한의 조정철 선수가 최고점을 받았다. 남북이 시상대 맨 위에 나란히 오르는 달콤한 기대에 빠졌다. 더구나 조정철 선수는 28살의 노장. 노장이 금메달을 즈려밟고 갔으면,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일본의 도미타 히로유키도 동점을 기록하면서 금메달이 세 명으로 늘었다. 남북한과 일본, 역사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세 나라의 대표선수가 나란히 시상대 맨 위에 오르는 장면도 보기에 좋았다. 금메달 세 개 감동도 세 배, 동북아 평화도 그렇게 왔으면 싶었다.

6일 유승민이 대만의 천취유안과 탁구 남자단식 8강전을 벌였다. 유승민의 드라이브를 쫓아가다 천취유안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결국은 유승민이 천취유안을 물리치자 괜스레 미안했다. 대만 선수들 가슴에 달린 ‘이상한 그림’을 보면 측은지심이 솟구친다. 이날 천취유안의 가슴에도 대만 국기 ‘청천백일기’가 아니라 대만올림픽위원회 깃발이 새겨져 있었다. 대만은 타이완이 아니다. 최소한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주최하는 경기에서 대만의 공식명칭은 타이완이 아니라 ‘차이니스 타이베이’(Chinese Taipei), 약자로 ‘TPE’로 쓴다. 중국의 막강한 힘은 대만의 이름을 빼앗아버렸다. ‘차이니스 타이베이’란 대만은 중국의 일부이고, 홍콩처럼 하나의 도시에 불과하다는 뜻이겠다. 어색한 휘장을 보면 친구가 떠오른다. 대만 친구는 명동에서 지나는 중국인을 보면서 “중국이 정말로 싫다”고 서슴없이 내뱉었다. 하기야 나라도 대만에서 나고 자랐는데, 중국이 너희는 우리의 일부라고 하면서 무력시위를 한다면 납득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가족은 대대로 대만에서 나고 자랐고, 그는 중국에 가본 적도 없다. 스스로를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남한은 남한이고 북한은 북한인 것처럼, 대만은 대만이고 중국은 중국”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국기를 달지 않는 세상을 희망하지만, 한 나라의 국기만 못 쓰게 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이주노동자’의 끈질긴 애국주의

대만이 제3의 고향이라면, 타이는 제2의 고향이다. 반성한다. 타이에 그렇게 위대한 선수가 있는지 몰랐다. 통숙 파위나. 도하 아시아경기대회 여자 역도 63kg급에서 중국 선수를 따돌리고 금메달을 차지해 조국의 동포들에게 크나큰 기쁨을 선사했다. 벌써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를 휩쓴 타이의 국민영웅이란다. 뒤늦게 통숙의 거사에 축전을 보냈다. 주변의 ‘타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에게 긴급히 문자를 보냈다. ‘우리가 조국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방콕에서 자문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뭘까? 단 하나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리하여 나의 정체성은 재규정됐다. 나는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뿌리 깊은 애국주의를 떨치지 못한다. 오늘도 태극마크를 응원하며 새벽을 밝힌다. 이렇게 끈질긴 내 안의 애국주의라니. 그래도 여전히 슬로건은 ‘우리는 아시아의 친구들’이다. 그런데 아시아가 하나의 대륙은 맞는겨? 중동, 서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4대륙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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