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했던 사람을 잡은 김연아의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은반의 우아함 속에서 동북아 저변의 ‘탈아입구’ 열망을 읽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스포츠에서는 기적 같은 일들이 가끔씩 일어난다. 눈이 펄펄 내렸던 12월의 주말 밤, ‘에수비에수’에는 이상한 자막이 떠 있었다. ‘김연아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 시청률 높이기 작전이로군, 싶었다. 멀쩡한 자막을 보면서도 김연아가 이전에 우승한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4차 대회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내 눈은 ‘파이널’이라는 글자를 읽었으나, 내 마음은 ‘파이널’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김연아의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은 나의 무의식 저편에서 ‘미션 임파서블’로 여겨지고 있었나 보다. 그랑프리 2차 대회 쇼트 프로그램에서 1등 했다고 언론이 호들갑을 떨 때 ‘대단하긴 하지만 오버하는군’ 싶었고, 4차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는 ‘어, 정말로?’ 하면서 놀랐다. 그래도 강자들이 총출동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고, 설마 진검승부를 겨루는 파이널에서 우승할까 의심했다. 그런데 정말로 김연아는 설마했던 사람들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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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김연아의 우승이 신윤동욱의 영광처럼 찡했다. 심지어 안양시민 신윤동욱은 이웃동네 군포시민 김연아의 쾌거에 남다른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또 다른 안양시민은 “걔 때문에 그 동네 집값이 올랐대”라고 전했다).
‘피겨 맘’과 함께 이뤄낸 기적
뒤늦게 경기를 보았고, 김연아의 우아함에 감탄했다. 그러나 감동이 가라앉고 밀려드는 착잡함, 정말로 이 나라에는 기적이 너무 많군. 기적 소리가 잦은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일까,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성공신화가 널렸으니 너도나도 목숨 걸고 경쟁에 나설 수밖에, 생각했다. 20세기 말에 ‘골프 파더’의 집념이 만든 박세리의 성공, 21세기 초에는 ‘피겨 맘’과 함께 이뤄낸 김연아의 기적, 이렇게 이 나라에는 성공담이 끊이지 않는다. 일심단결한 가족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뤄낸 성공신화, 경제개발의 논리는 이렇게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 있다. 골프, 펜싱, 역도, 하키, 핸드볼, 피겨…. ‘하면 된다’의 증거들이 줄줄이 나온다.
그랑프리 파이널을 보면서 또 하나의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은반은 동양인이 점령했군 싶었다. 알다시피 김연아의 라이벌은 대부분 일본인이다. 동갑내기 라이벌 아사다 마오, 또 다른 경쟁자 안도 미키. 90년대 후반부터 떠오르던 중국 여자선수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만 있으면 완벽한 동북아 삼국지 완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동양인들은 (투명한 백색의!) 은반을 점령했다. 물론 이리나 슬루츠카야 같은 러시아인, 미국의 백인들이 또 다른 꼭짓점으로 버티고 있지만, 여자 싱글에서 아시아의 강세는 유례없다.
은반의 여성들에서 동북아시아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열망을 읽는다. 일본을 원조로, 중국이 따르고, 한국이 쫓아가는, 동북아의 저변에 흐르는 탈아입구의 열망 말이다. 먼저 빙판의 탈아입구 열풍은 아메리카에서 불어왔다. 90년대 초반의 일본계 크리스티 야마구치, 90년대 중반부터 중국계 미셸 콴, 2000년을 전후해 반짝했던 한국계 남나리. 야마구치는 92년 알베르빌 겨울철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미셸 콴은 96년부터 5번의 세계선수권대회를 제패했으며, 남나리는 99년 전미 선수권 여자싱글 2위를 차지하면서 유망주로 떠올랐으나 부상을 당해 페어로 전환했다. 이렇게 미국의 동양계들이 줄지어 피겨, 특히 여자싱글에 매진하는 이유는 우아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투영된 때문이 아닐까. 남자싱글보다 여자싱글에서 강세를 보이는 이유도 그렇다. 물론 피겨가 체격이 크지 않은 아시아인들의 체형에 적합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우아한 스포츠라는 피겨의 이미지가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 아닐까. 경제적 풍요 다음에 오는 문화적 욕망 말이다. 한국계 미국인 그레이스 리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다큐는 미국의 아시아계 여성들 중에 유난히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많다는 내용에서 출발한다. 피겨에도 이런 ‘그레이스 콤플렉스’가 반영돼 있지 않을까(백인들의 전유물이라는 수영에서도 피겨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피겨에 투영된 동북아 콤플렉스?
미국뿐 아니라 ‘본토’에서도 피겨 열풍은 거세다. 역시나 일본이 앞섰다. 일본의 이토 미도리는 89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92년 알베르빌 겨울철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일본은 꾸준히 정상급 선수를 배출해오다가 2006년 토리노 겨울철올림픽에서 아라카와 시즈카가 숙원이었던 금메달을 따냈다. 중국도 90년대 후반부터 여자싱글에서 메달권에 접근하는 실력을 쌓아왔다. 한국은 남나리에 걸었던 희망이 꺾였지만, 김연아라는 기적이 등장했다. 일본의 선전이 국가와 국민의 의해 만들어진 기적이라면, 김연아의 우승은 진정한 자생적 기적이다. 동북아의 성장과 콤플렉스를 동시에 드러내는 피겨에서 기적처럼 등장한 김연아의 존재는 여러모로 한국 사회의 어떤 면모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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