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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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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의 그 처연한 눈빛

등록 2006-11-15 00:00 수정 2020-05-03 04:24

드리블·패스·슈팅까지 못하는 것 없는 대학 신입생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나…허재의 재림을 이루기엔 늘 ‘한끗’이 부족했던 그도 철이 들고 늙어간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가 은퇴하면 가장 슬플 것 같은 운동선수는, 내게는 김병철(33·대구 오리온스) 선수다. 어언 15년을 동고동락해왔다면 ‘뻥’이지만, 15년 동안 나는 언제나 그가 있는 팀의 팬이었다. 그는 물론 모르지만, 혼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일천구백구십이년 고려대학교 1학년생인 그가 경기를 뛰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경악했다. 유연한 드리블에 놀라운 점프력, 날카로운 패스에 정확한 슈팅까지 농구기술 4종 세트를 겸비한 그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같은 학번 동기인 전희철과 함께 고대 농구의 암울한 시절을 마침내 끝장낼 구세주처럼 보였다. 그러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서너 번 지나면서 기대가 컸던 만큼 원망도 커졌다. 기억을 과장하면, 그는 정말로 잘했지만 그다지 팀에는 도움이 안 됐다. “걔 때문에 이기는 경기도 있지만 지는 경기는 더 많아.” 친구에게 그렇게 투덜거렸다.

불행히도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약했다. 한두 점 지거나 비기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마지막 3점슛을 던지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대가 커서가 아니라 실망이 두려워, 눈을 감았다. 이승환의 노래처럼,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을까. 세 번 던지면 두 번은 아슬아슬하게 림을 빗나갔다. 그리고 독백하기를, “저 인간, 또 저러네”. 30점을 넣으면 뭐하나, 마지막 3점 아니 2점을 넣어야 이기지. 그도 “그때는 욕심이 많았다”고, “기복이 심했다”고 고백했다.

아니, 김병철이 패스를 했단 말이야

김병철이 뛰던 고대 농구팀은 우승을 못하면 이상할만큼 잘하는 선수들로 구성됐지만, 끝끝내 농구대잔치 우승을 못했다. 마지막 승부는 아직도 아프다. 1995~96 농구대잔치 준결승, 고대가 기아에 졌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제 김병철도, 전희철도 졸업이었다. 마지막 휘슬이 울릴 때, 김병철의 처연한 눈빛을 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용서했다. 미운 정이 쌓이고 쌓여서 고운 정마저 들었다고, 앞으로도 김병철을 응원할 수밖에 없겠다고,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김병철이 뛰는 대구 오리온스(당시는 동양)의 팬이 됐다. 그의 프로 인생도 기복이 심했다. 오리온스는 영원히 깨지기 힘든 32연패의 기록을 세우며 두 시즌 연속 꼴찌를 하더니, 2001~2002 시즌에 갑자기 우승을 했다. 물론 마르커스 힉스라는 걸출한 외국인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김병철과 전희철의 공헌도 컸다. 오리온스가 우승을 하자 10년간 쌓였던 설움이 조금은 풀렸다. 우승을 하던 해에 김병철과 전희철은 자유계약선수가 됐다. 전희철은 떠났고, 김병철은 남았다. 그리하여 김병철은 오늘날 오리온스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됐다. 김병철의 플레이가 철들어가는 모습도 보았다. 스스로 경기를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듯 보였던 김병철이 조연도 마다하지 않는 선수로 서서히 변했다. 어떤 순간엔, 아니 김병철이 지금 슛을 안 쏘고 패스를 했단 말이야, 보면서 놀랐다. 또 언젠가는, 그렇게 힘들게 골 밑까지 갔다가 스스로 마무리를 안 하고 공을 외곽으로 빼줬단 말이야, 생각했다. 철드는 동생을 보듯이 대견스러우면서도 아쉬웠다. 요즘의 김병철은 3점슛 쏘려고 ‘용’쓰지 않고, 반칙을 얻어서 자유투로 승부를 끝내는 필살기도 터득했다. 그렇게 ‘나는 피터팬’은 노련한 주장으로 성숙했다. 그는 “요즘은 가끔씩 스스로도 ‘내가 정말 노련해지긴 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고 말했다. 진작에 철들지, 조금은 아쉽다.

용산고 시절에 만들어진 만능 기질

사실은 허재의 재림을 기대했다. 솔직히 확신했다. 그만큼 전성기의 김병철은 다재다능했다. 만능선수 허재처럼 김병철은 못하는 기술이 없었다. 만약에 체력장을 하듯이 경기력을 슈팅, 드리블, 패스로 쪼개서 분야별로 평가한다면 전성기의 김병철은 동시대의 한국 선수 중 평균점수 최고였을지 모른다. 순발력, 유연성, 스피드, 탄력으로 나누어서 체력장을 실시해도 김병철이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이상민처럼 도움주기의 달인이 아니고, 문경은처럼 3점슛 전문가도 아니지만, 김병철에게는 말 그대로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매력이 있었다. 슛을 노리다가 막히면 돌파하고, 필요하면 패스하는 슈팅 가드로서 김병철의 자질은 훌륭했다(올라운드 플레이어가 코트에서 소멸하는 가운데 그를 ‘마지막 슈팅 가드’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김병철은 허재처럼 최고 중의 최고가 되지는 못했다. 슛이 정확하고, 돌파도 뛰어나고, 패스도 날카롭지만, 무언가 ‘한끗’이 부족했다. 그것이 허재보다 3cm 작은 키였는지, 집중력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그는 “(나는) 허재 형이랑 비교할 기량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더구나 김병철은 허재를 배출한 용산고 출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질이 용산고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당시에 양문의 감독님이 모든 걸 잘하길 원했다. 경기에서 슛을 잘 넣어도 슛만 쏜다고 밤 10시까지 돌파연습을 시키고, 돌파를 잘해도 돌파만 한다고 5시간 동안 슈팅만 시켰다.” 그렇게 기질은 몸에 익었다.

이번 시즌에도 건재를 과시하고 있지만, 어느덧 그도 선수생활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이제 오리온스와 계약이 2년 남았다. 그는 “요즘은 가끔씩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난감할 때가 있다”며 “계약이 끝나고 힘들면 은퇴하고, 아니면 더 뛰고…”라고 말했다. 그리고 “20여 년 해왔던 운동을 그만두면 슬플 것 같다”고 덧붙였다. 너도 슬프냐, 나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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