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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해설자’로 돌아온 전설들

등록 2007-03-01 00:00 수정 2020-05-03 04:24

해박한 지식으로 정확한 정보 주던 배구 해설자 오관영의 추억…코트의 전설 최천식·박미희·마낙길·김세진이 그 자리를 이을까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내 인생의 해설자는 누굴까. 인생을 풀이해준 용한 선생님은 못 만났지만, 경기의 맥을 정확히 짚어주는 해설자는 만났다. 내 인생의 해설자를 꼽으라면, 배구 해설자 오관영(69)을 꼽겠다. 1980~90년대 한때는 배구보다 농구를 좋아한 적도 있지만, 언제나 해설은 배구 쪽이 나았다. 1980~90년대 한국 배구의 전성기를 함께한 오관영의 해설 때문이었다.

박식함에 현장감을 갖춘 유려한 중계

무엇보다 그의 해설은 정확했다. 선수의 장단점은 물론 팀으로서 파괴력까지 정확하게 예측했다. 당시로는 드물게 세계 배구의 흐름에 정통했는데, 아마도 일본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농구의 본고장 미국이 머나먼 탓인지 농구 해설가들은 NBA 선수의 이름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배구의 사실상 본고장인 일본이 가까운 때문인지 그는 세계 배구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국제 경기를 해설하면 한국팀 응원 해설을 넘어서는, 드문 경지를 보였다.

그렇게 그의 해박한 지식은 ‘새로운’ 정보를 주었다. 부족한 지식을 높은 목청으로 때우려는 해설자들이 대세를 장악하던 시절, 그는 쉽게 흥분하지 않았지만 긴장을 잃지도 않았다. 날마다 흥분으로 해설을 때우는 해설자들은 정작 결정적 순간에 시청자를 흥분시키지 못하지만, 그는 달랐다. 어쩌다 그가 흥분하면 나도 흥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마니아다운 박식함에 경기인스러운 현장감까지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탁성이 섞인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은근한 미소가 번진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아” 하면 “어” 하는 해설의 파트너 유수호 캐스터가 있었다. 오관영-유수호 커플의 유려한 중계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멋진 경기를 엉뚱한 해설로 망치는 중계를 볼 때마다 아직도 오관영의 희끗한 머리가 그립다. 오관영은 1998년 목회자의 길을 걸으면서 마이크를 놓았고, 2006년 한국배구연맹(KOVO)컵 해설자로 잠시 복귀했다.

그리고 레전드가 해설자로 돌아왔다. 축구의 차범근, 농구의 김유택 같은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설에 관해서라면 역시나 배구의 전설들이 뛰어나다. ‘코트의 귀공자’ 최천식(42)은 2004년부터 해설자로 돌아왔다. 배구도, 해설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해설 방식은 플레이 스타일과 닮았다. 최천식의 해설은 깔끔하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필요한 정보를 빼놓지 않고 전달한다. 기본기에 충실했던 깔끔한 플레이처럼 해설에도 군더더기가 없다. 게다가 매력적인 비음에 정확한 발음까지 겸비해, 정말로 최천식은 목소리마저 준수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천식의 해설이 축구의 이용수에 가깝다면, 마낙길(37)의 해설은 신문선에 가깝다. 장단의 고저를 살린 말투에 구수한 입담과 끝없는 비유가 이어진다. 경기인 출신만이 아는 이면을 말하기도 즐긴다. 가끔은 목청도 높여서 ‘코트의 야생마’라는 별명이 괜스레 붙여진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조금은 엉뚱한 비유에 웅얼대는 발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1980년대 스타 박미희(44)도 20년 만에 돌아왔다. 세월이 흘러도 예리함은 여전하다. 그의 해설에서는 예리한 페인팅(스파이크라기보다는) 같은 분석이 빛난다. 박미희는 170cm가 겨우 넘는 단신으로 장신들이 즐비한 센터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뛰어난 운동신경뿐 아니라 예민한 판단력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코트의 여우’였다. 박미희의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그에게는 선수 시절부터 왠지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가 있었다. 감독을 해도 잘할 것 같은 타입의 선수 말이다. 어쩌다 관중석에 앉은 박미희가 중계 카메라에 잡히면, 그에게 감독 지휘봉이든 해설자 마이크든 주어졌으면 싶었다. 그렇게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런 그가 마침내 해설자로 돌아왔다. 역시나 박미희는 ‘여우’답게 경기의 흐름을 읽고 선수들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는 해설로 또 다른 명성을 쌓고 있다. 월드스타 김세진도 해설자로 돌아왔다. 김세진은 해설의 ‘초짜’지만, 여유로운 말투로 방송 체질임을 증명했다.

‘레전드’가 전하는 솔깃한 뒷이야기

레전드가 해설자로 돌아오는 현상은, 한국 스포츠에 역사가 쌓여가고 있다는 증거다. 역사가 쌓여야 전설이 생기고, 은퇴한 전설이 말하는 오늘에 혹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레전드를 해설자로 만나는 즐거움은 감독으로 성공한 스타를 보는 것만큼 즐겁다. 김세진이 말하는 삼성화재 배구단의 뒷이야기, 최천식이 전하는 대한항공의 속사정, 마낙길이 말하는 현대캐피탈의 그 시절은 얼마나 솔깃한가. 팬들에게는 감독으로 성공한 스타보다 해설자로 돌아온 전설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존재다. 오늘날 스포츠에는 두 가지 새로운 흐름이 생겼다. 축구처럼 마니아 출신 해설자들이 떠오르는 종목이 있다면, 배구같이 전설적인 선수가 해설자로 돌아오는 경향도 있다. 어서 빨리 그들의 해설이 농익어서 내 인생의 해설자가 바뀌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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