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상품 속에 놓인 인간을 들여다볼 때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논의 시작, 기업도 적극 나서야

서울시, 인권 초점 보호조례 제정… 감정노동에 가치 부여
등록 2016-11-15 23:53 수정 2020-05-03 04:28
일, 행복 그리고 여성
인류 생존의 틀을 마련했던 돌봄과 재생산 등 여성이 지닌 장점은 자본과 힘의 논리에 밀려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했다. 가정은 노동력 재충전의 장소지만 여성의 가사노동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육아나 살림은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일보다 훨씬 싼 노동의 대가를 받을 뿐이다. 예전엔 여성 가사노동의 화폐적 가치를 논하는 것조차 금기였다. ‘어머니의 숭고한 노동을 어떻게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느냐’는 논리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따져야 할 필요는 이미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사고 등에 따른 손해배상이나 이혼시 재산 분할, 사회보험 등의 영역에선 이미 적용되고 있다.

얼마 전 백화점 고객이 판매직원을 무릎 꿇게 한 사건이나 아파트 경비원을 폭행한 사건, 콜센터 상담사에게 가해지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폭언과 성희롱 등은 우리 나라 업무 현장에서 발생하는 감정노동의 심각성을 알렸다.

이를 계기로 감정노동자에 대한 고객의 무리한 요구나 괴롭힘을 적극적으로 규제하고, 감정노동 문제를 산업재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부각되었다. 특히 국회에서는 법 개정으로 보험업과 여신업에서, 서울시와 광주시에서는 조례로 고객 응대 업무를 하는 감정노동자의 보호가 제도화되었다.

항공기 승무원 사례로 ‘감정노동’ 개념 도입
감정노동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억누르다 정신적 질환을 겪기도 한다. 서울시와 안전보건공단 관계자들이 지난 5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감정노동자 권리보호 캠페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감정노동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억누르다 정신적 질환을 겪기도 한다. 서울시와 안전보건공단 관계자들이 지난 5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감정노동자 권리보호 캠페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이제 제조업에서 서비스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지난 20년 사이 서비스산업 고용 비중은 이미 제조업을 추월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서비스 사회화’라고 부른다. 서비스노동의 성격은 이전의 제조업 중심 육체노동과 다르다. 이 때문에 서비스노동의 특성 역시 생산직이나 사무직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른바 ‘고객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조절하는 감정노동이 서비스노동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러한 감정노동이 지속되면 감정 격차, 부조화 현상으로 우울증·공황장애·자살 등 정신적 문제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전 예방’과 ‘사후 관리’가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기업의 과잉 서비스나 친절 모니터링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학계와 노동계 의견이다. 특히 서비스 노동자에 대한 고객의 무리한 요구나 괴롭힘을 정부와 기업이 직접 나서 적극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A. R. Hochschild)가 저서 에서 항공기 승무원 사례를 토대로 ‘감정노동’의 개념을 처음 사용한 이후 감정노동은 서비스노동의 보편적 특징으로 알려졌다. 혹쉴드는 저서에서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을 “소비자들이 우호적이고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외모와 표정을 유지하고 자신의 실제 감정을 억압하거나 실제 감정과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등 감정을 관리하는 노동”이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감정노동 직업은 밝은 미소를 지어야 하는 ‘긍정적 감정노동’(서비스, 판매직)뿐 아니라 로봇처럼 무표정한 ‘중립적 감정노동’(심판, 카지노 딜러, 장의사 등) 그리고 화난 목소리와 태도를 드러내야 하는 ‘부정적 감정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직업(채권추심원, 조사관, 보안 경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문제는 서비스 노동자들은 회사 규정과 서비스 매뉴얼 때문(표면행위, 내면행위 강요)에 자존감 상실은 물론이고 내·외부 평가제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부 직원의 경우 정신적 질환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집을 나와 직장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가거나 언제든 일상적으로 서비스 노동자들을 대한다. 극장이나 서점 혹은 식당에 들어서면서부터 감정노동자와 마주한다. 서비스노동은 고객과의 대면 혹은 전화 응대를 통해 고객과 상호과정이 형성되는 대표적인 직군이다. 이전의 제조업 육체노동과는 다른 공간(front)에서 일(work)하는 서비스노동의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조업 생산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2016년 6월 주요 서비스산업 노동실태조사 결과, 전체 조사자의 52.5%가 지난 1년 동안 폭언을 경험했다. 특히 폭행(2%)보다 성희롱(6.6%)이 3배 이상 많았다. 물리적 폭행보다 성희롱이 많다는 것은 고객으로부터 받은 구체적인 불쾌한 행위가 제3자에게 잘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비스 감정노동자들은 일터에서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셈이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기업일수록 감정노동 매뉴얼 강화

기업은 소비자와 감정노동자 간 상호작용 과정에 개입해 소비자가 물건을 사게 하는 가시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대기업일수록 과도한 감정노동을 요구하는 규칙과 매뉴얼을 확대·강화하고 있다.

현재 기업 주요 경영 전략으로 자리매김한 다양한 평가와 모니터링은 감정노동을 강화하는 원인 중 하나다. 폐회로 텔레비전(CCTV)은 기본이고 고객을 가장해 서비스를 평가하는 미스터리 쇼퍼, 모니터링 그리고 스마일 존(service line)과 같은 통제 방식이 활용된다.

현대사회에서는 무형적 감정노동이 결합돼 ‘서비스’라는 상품이 생산되고, 이는 기업 이윤창출의 근원이다. 그만큼 기업 시스템은 사적 감정까지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여 인간의 노동을 상품화한다. 문제는 제조업과 달리 서비스노동 성격상 노동 과정이 자율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함에도 표준화·획일화된 양식으로 규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개별 기업에서는 고객에게 표출하는 감정적 서비스의 양과 질이 ‘매출’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이유로 판매 목표량에 따른 인센티브 제도를 설계해 자발적인 경쟁과 노력이 작동하게 만들고, 기업은 매출 향상이라는 이윤을 동시에 추구한다. 일부 기업은 아직도 ‘고객은 왕’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16년 주요 서비스산업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감정노동 수행과 노출은 매우 높았다. 에서 알 수 있듯이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96.1%)하고, 자신의 실제 기분과 다른 표현(90.2%)을 하고 있다. 특히 고객을 응대하기 위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숨길(94.5%)뿐만 아니라, 기업이 요구한 표현을 수행(87.9%)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를 반영하듯 주요 대기업은 ‘밝은 미소’라는 감정의 도구화를 통해 감정노동자 스스로 자기 직무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이는 기업이 요구하는 올바른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개인이 느낄 수 있는 다른 감정을 억압하고, 업무에서 요구되는 감정 외에 다른 감정의 규칙들을 회피하게끔 한다.

현재 우리나라 주요 기업들에서는 고객의 무리한 요구나 불쾌한 언행에 실질적인 대응이나 규제를 찾아보기 힘들다. 대체로 고객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노동은 내부 규정을 통한 대응이 가능한데, 대응 매뉴얼이나 규제양식 마련은 아직 미약한 수준이다.

에서 확인되듯 현재 주요 서비스산업의 고객 응대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는 비율은 62.3%였다. 물론 고객 응대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 도와주는 공식적인 제도와 절차가 수립된 곳도 57.8%였다. 그나마 최근 감정노동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받게 되면서 개선된 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주요 서비스산업의 일선 현장에서는 악성 고객에 대한 자체 업무규정(매뉴얼)을 마련해놓았다. 주로 고객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 대처법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사태 확대를 방지하는 차원이지 본질적인 규제 방안은 아니다.

특히 고객에게 당하는 물리적 폭력이나 성희롱 같은 문제는 개별 노동자로서 대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조직적 대응과 규제 양식이 필요하다. 서비스산업 노동자들은 특별한 대응 없이 고객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외면하는 등의 ‘소극적 대응’을 취하고 있다. 일부 사례지만 조직 내부 규정과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적극적 대응’도 존재한다.

침묵했던 현실에 변화의 목소리
2011년 12월14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서비스유통 노동자들이 환자복과 파자마를 입은 채 ‘유통업체 연장 영업 반대’ 등을 요구하는 플래시몹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2011년 12월14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서비스유통 노동자들이 환자복과 파자마를 입은 채 ‘유통업체 연장 영업 반대’ 등을 요구하는 플래시몹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바로 직전에 다른 고객과의 분쟁이나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한 직원, 또 천편일률적인 매뉴얼대로만 고객을 응대하는 직원을 대한다면 우리의 기분은 어떨까. 반대로 자율성이 부여되고, 심리적인 휴식 시간과 공간이 마련된 일터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대할 때는 어떤 상황일까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고객 감정에 맞춰야 하는 심리적 부담이 클수록 신체적·정신적 리듬이 흐트러지기 쉽다. 고객 응대 등 모든 작업 과정의 실시간 모니터링 체제가 구축된 일터에서는 그 어떤 개선책도 여의치 않다.

고객은 더 많은 서비스와 정보 제공을 원한다. 제품 하나하나 설명받으려 하고,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기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숙련된 서비스 노동자들은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서비스노동 가치가 저평가되는 상황은 감정노동 문제 해결을 더디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고객의 요구 수준이 높아지는 동시에 시민의식도 함께 성숙된다는 점이다. 지난 10년 동안 감정노동 문제가 언론과 정부기관, 사회단체에서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시민들의 감정노동 인식 수준도 높아졌다.

2015년 서울시민 1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78.8%의 시민이 감정노동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감정노동 문제가 사회적 이슈였다. 2016년 6월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에서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는 감정노동 해결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국민 10명 중 9명은 과도한 요구를 하는 고객에게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또한 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업무량과 휴식시간을 제공하고, 친절교육만이 아니라 전문적인 직무교육 훈련도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최근 감정노동자의 보호와 권리에 대한 논의들은 국회에서 법안으로, 지자체에서 조례로, 개별 기업에서 규칙과 매뉴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국내 한 도시락 판매업체는 “우리 직원이 고객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다면 직원을 내보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직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시면 고객을 내보내겠습니다”는 내용이 담긴 공정서비스 권리 안내문을 게시했다. 서울시 120다산콜센터는 직원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하는 고객에게 주의조치 후 전화를 ‘끊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한편 서울시는 지난 1월 전국 최초로 감정노동자 권리보호 조례를 제정하고 2016년 10월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어떤 정책이 발표될지 기대해봐야겠다. 서울시 감정노동자 조례에 담긴 가이드라인은 그동안 시민사회단체나 학계에서 요구한 내용이 모두 담겨 있다. 과도한 감정노동 규칙을 제거하고 감정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자는 목소리다. 감정노동자의 인격적인 대우와 인권에 대한 접근이면서 감정노동을 노동 이전에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정의(justice)의 관점에서 출발했다.




서울특별시 감정노동  종사자의  권리보호  등에  관한  조례
[제6101호,  2016년 1월7일]


제9조(가이드라인의 공표) ① 시장은 개선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감정노동 종사자에 대한 권리보호와 감정노동 사용자·서울시 계약 사용자·고객의 의무 등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공표하여야 한다.
② 제1항의 가이드라인은 아래의 내용을 포함하여야 한다.
1. 사업장 내 모든 사람이 감정노동 종사자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
2. 감정노동 업무의 전문성 인정과 그에 맞는 처우 보장 의무
3. 감정노동 종사자를 위한 적정한 휴게시간과 휴식공간 보장 의무
4. 감정노동 종사자를 위한 안전한 근무환경 조성 의무
5. 감정노동 종사자를 효율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고객 응대 매뉴얼 마련 의무
6. 감정노동 종사자에 대한 고객의 폭언·폭행·괴롭힘·성희롱 등 부당한 행동에 대하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작업 중지권 등 적절한 권한 부여 의무
7. 감정노동 종사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전문인력 배치 의무
8. 감정노동 종사자의 자기보호를 위한 정기적 교육 실시 및 감정노동 종사자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 지원 의무
9. 감정노동 고위험직군에 대한 특별한 보호 방안
③ 시장은 서울시 감정노동 사용자로부터 매년 가이드라인 준수 여부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받아야 한다.


‘욕 먹는 일’에서 ‘가치 있는 일’로

우리 사회에서도 좋은 일터, 행복한 직장, 보람 있는 일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과거와 달리 노동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상품화된 노동이 아니라 인간중심적 노동으로 변화하고 있다. 감정노동 문제는 개별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므로 감정노동 대응 및 규제양식을 도입한 좋은 사례는 적극 홍보하고 권장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다 그렇듯 업무량이 많아질수록 고객 응대 과정에서 좋은 서비스는 불가능하다. 감정도 상품화된 시대에, 감정노동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쉽지 않다. 그러나 감정노동자들이 행복한 일터에서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한 기획은 시작해볼 필요가 있다.

감정노동자의 일이 ‘욕먹는 낭비적인 일’이 아니라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할 때 문제 해결은 가능하다.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 그 하나면 충분하다. 고객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홍보물을 붙이는 것, 직원들에게 친절교육만이 아니라 감정노동 교육을 함께 배치하는 것, 고객으로부터 과도한 질책과 폭언을 경험한 직원에게 휴식시간을 제공해주는 것, 폭행과 성희롱으로부터 혹은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주는 것. 과연 이런 것들을 도입할 경우 한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거나 기업이 생존하기조차 어려워질 정도로 무리한 요구인지 정부와 기업에 묻고 싶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