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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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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들의 반란, 이제부터 시작이다

매실한과로 연매출 7억원 올린 당진 백석올미영농조합

침체된 고령 마을에 수익과 공동체 활기까지 되살려
등록 2016-11-16 23:53 수정 2020-05-03 04:28
일, 행복 그리고 여성
인류 생존의 틀을 마련했던 돌봄과 재생산 등 여성이 지닌 장점은 자본과 힘의 논리에 밀려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했다. 가정은 노동력 재충전의 장소지만 여성의 가사노동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육아나 살림은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일보다 훨씬 싼 노동의 대가를 받을 뿐이다. 예전엔 여성 가사노동의 화폐적 가치를 논하는 것조차 금기였다. ‘어머니의 숭고한 노동을 어떻게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느냐’는 논리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따져야 할 필요는 이미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사고 등에 따른 손해배상이나 이혼시 재산 분할, 사회보험 등의 영역에선 이미 적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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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사무실 문을 들어오는 할머니들의 갑작스런 인사말에 당황할 때쯤 김금순(67) 대표의 조언이 이어진다. “워크숍 때 정한 실천 사례로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는 건 좋은데, 눈을 마주치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다시 한번 할머니들이 모두 힘차게 “사랑합니다” 외치며 조회가 시작되었다.

9월26일 월요일 아침 8시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백석올미영농조합의 풍경이다. 2011년 매실한과를 생산하는 조합으로 평균연령 76살의 할머니들이 함께 일하는 공동체다. 젊은이들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요즘, 그것도 농촌에서 할머니들이 만들어가는 일터라니. 게다가 매주 월요일마다 괴로워하는 직장인과 달리 즐겁게 일하며 건강한 노후를 만들어가고 있다니 더욱 궁금증이 커졌다. 그 비결을 알기 위해 월요일 아침 조회에 참석하고자 전날 합덕읍 터미널 근처에서 자고 이른 아침 택시로 15분 달려 도착했다. 하루에 버스가 세 번 운행하는 교통 오지이기 때문이다.

마침 방문한 날은 추석을 지낸 뒤 오랜만의 회의 자리였다. 9월20~21일은 1박2일 워크숍을 다녀왔고 23일에는 당진 사회경제인의 밤 행사까지 여러 행사가 이어졌다. 모처럼 다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업무회의를 시작했다. “처음 워크숍이어서 걱정했는데 잘됐다”라는 김 대표의 얘기에 “정말 다들 열심히 참여하더라” “대표님이 조를 잘 선정해줬다” 등 웃음소리와 함께 지난주 즐거웠던 일들을 나눈다.

7억원 매출 예상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

오늘의 주된 안건은 추석 판매 실적. “이번 추석에는 1억5천만원 매출을 올렸다” 김대표의 보고가 이어지고 할머니들이 저마다 소감을 얘기한다. 할머니들이 만든 영농조합이라고 해서 부업 정도로 생각했다가 매출 규모에 놀랐다. 한과는 추석과 설이 대목이지만 지난해 6억1천만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7억원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9천4백만원 매출로 시작한 조합이 4년 만에 640% 성장했다.

판매 노하우는 무엇일까? 영업을 처음해보는 이들에게 한과 팔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 만든 한과가 입소문을 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인의 도움으로 1년간 예식장 답례품을 납품했지만 3만원짜리 한 상자를 배달하기 위해 20km를 왕복하며 한과 판 돈보다 기름값이 더 들기도 했다. 당진 시내 14개 농협 마트, 충남도청 구내 마트, 대전 품앗이로컬푸드, 지역 내 축제와 마을기업 박람회까지 인근 곳곳을 누비며 열심히 홍보했다. 한 개만 팔더라도 열심히 제품을 알리자는 취지로 발품을 팔았다.

할머니들마다 명함을 만들어서 주변 지인들에게 알리며 판매하도록 했다. 그래도 쉽지가 않았다. 첫해 명절에는 할머니들의 아들딸에게도 판매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렇게 5천만원어치를 판매한 뒤 할머니들에게는 고객 500명이 생겼다. 500명을 기준으로 명절이 되면 안내장을 보냈다. 500명이 어느덧 1천명으로 늘고, 지난 추석에는 6500명이 되었다. 한 번 구매하면 평생 고객이 된다. 또한 판매 경로도 다변화되었다. 처음에는 조합원이 100% 팔았는데 지금은 온라인(50%), 조합원(15%), 당진농협직거래(25%) 등이다.

꾸준한 매출 증가세에도 오히려 이번 추석은 목표치보다 다소 미달되었다며 판매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직영판매장 활용 방법도 나왔다. 각종 체험 프로그램으로 오는 고객을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매장 제품을 홍보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외부 판매장이나 온라인 판매처의 경우 15% 수수료가 지불된다. 반면 직영 매장은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아서 조합에 온전히 이익이 돌아온다.

김 대표가 “부담스럽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판매장 있으니 5천원짜리 하나라도 사가라고 슬쩍 얘기해보자”라고 제안한다. “맞아, 사실 5천원 구매하는 건 어렵지 않지” “잘 살펴서 농담 잘하는 사람을 끌고 오면 돼”라고 여기저기서 맞장구친다. 그러다 어느 분이 “공짜 상품 있으면 권하기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한다. “먹어봐야 우리 맛을 아니까”라는 수긍이 이어진다. “만들다가 모양이 잘못 나온 걸 모아서 줄까?” “아니야 정품을 줘야지. 괜히 주고도 욕먹을 수 있어” 등등 여기저기서 의견이 나온다. 이날 회의를 거쳐 시식 상품을 따로 만들어서 직영판매 수입을 올리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이번주 조합 일정을 확인하고 각자 업무를 확인한 뒤 8시50분쯤 회의가 끝났다. 비닐하우스 작업을 하는 조, 오전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조 등 일사분란하게 헤어진다. 할머니들이 사업을 함께 고민하고 결정해가는 모습이 신기해 결재 업무로 바쁜 김 대표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노년의 나무심기가 귀촌으로 이어져
2014년 7월17일 백석올미영농조합 할머니들이 한과 포장 작업 중이다. 백석올미영농조합 제공

2014년 7월17일 백석올미영농조합 할머니들이 한과 포장 작업 중이다. 백석올미영농조합 제공

먼저 매주 이런 회의를 하는지 궁금했다. 마을공동체가 많아지면서 마을주민들이 함께 사업을 하는 경우도 생겨나지만 보통 대표자만 총대 매고 일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다 사업 경험이 없는 할머니들이 모여 함께 조합을 운영해가고 있다니 그 비결이 궁금했다.

“매주 월요일 운영위원회를 하고 월례회의가 있다. 부서별로 1년에 세 번 총회를 하고, 또 전체 정기총회를 한다. 개발팀, 가공팀, 영업팀 등으로 나눠 체계적으로 조직관리를 한다. 할머니들이 모여서 사업한다고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는다. 대표 혼자서 다 할 수 없다. 처음 백석마을 이장이 부녀회장을 권할 때도 내건 조건이 ‘이장님 부인이 총무를 해야 한다’였다. 그러고 나서 전에 부녀회장했던 분들을 모두 고문으로 자리를 마련했다. 마을의 다른 할머니들도 반장 6명, 부회장 2명, 감사 2명으로 각각의 역할을 줬다. 마을 일에 열심히 하려는 분이 많았다. 다만 부녀회장이 되면 여기저기 회의하러 가야 하는데 차가 없으면 힘들기 때문에 나서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마을활동 하던 할머니들이 지금도 조직을 이뤄 함께 일한다. 부녀회장으로서 마을의 자원들을 잘 엮은 셈이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도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다. 역할과 자리를 마련해주면서 체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더욱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1인 1표로 운영되는 협동조합에서 조합원의 역할을 잘 매김하지 않으면 방관자나 평론가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김 대표가 노련한 기업가이자 조직가처럼 느껴져서 사업 경험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전혀. 자녀 학교에서 학부모회장은 했기에 이런 조직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업을 해보지는 않았다. 쭉 서울에서 생활했고 백석마을도 남편 따라 귀촌해 정착하며 휴식을 갖는 노후를 보내려 했다. 대기업 임원이던 남편이 1998년 퇴직했는데 1997년부터 주말마다 당진에 내려와 정원수를 심었다. 나무를 심고 싶었는데 아무데나 심을 수 없어서 남편 고향인 당진의 형님 밭둑에다 목련 5그루를 심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이미 남편은 귀촌할 집을 생각하고 정원수 묘목을 심은 것 같다. 텃밭도 만들어 작물을 수확해 이웃에 나눠주며 10년 동안 서울과 당진을 오가는 생활했다. 그러다 2007년경 나무를 심어놓은 텃밭이 수몰 지역이 되었다. 당시 남편도 몸이 안 좋아 요양이 필요했기에 이번 기회에 귀촌을 하자 싶어 백석리에 땅을 사고 공동주택을 짓고 함께 살 사람들을 모았다. 그렇게 2009년부터 백석리 마을에서 살게 되었다.” 귀촌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김 대표도 노년의 휴식 공간으로 생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백석리 마을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자녀들에게 제2의 고향을 만들어주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자’란 마음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수지침 봉사 등을 하러 다녔다. 농촌에서는 60대 초반이 비교적 젊은 나이란 이유로 부녀회장을 맡게 되었을 때도 처음에는 봉사활동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농촌 마을 문제 함께 풀어가기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중견기업으로 발전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김 대표는 농촌 할머니들의 고단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이제 사회에서 할 일이 없겠구나 생각하고 내려왔는데 저보다 연세가 많은 분들이 새벽부터 밤중까지 열심히 농사짓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그렇게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본인들이 먹고 애들에게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백석마을은 고령화된 마을로 특별한 소득원이 없었다. 마을 전체적으로 10만 그루의 매실나무가 있어 마을 주민 대부분이 매실 경작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값을 못 받는 천덕꾸러기였다. 마을 어르신들이 일한 대가를 제대로 받아갈 수는 없을까? 서로 협동해 즐겁게 일하며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까? 이분들과 더불어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마을에 활기를 넣을 수 있는 방법을 마을 이장, 노인회장, 부녀회장이 함께 논의했다. 그러면서 매실을 그대로 팔기보다 가공해보는 게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마을의 왕매실과 ‘해나루’ 쌀을 이용해 조청을 만들어 매실한과를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명이 한과 공장을 세울 수는 없지만 함께 힘을 모으고 마을 자산으로 시의 지원을 받는다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게 33명이 200만원씩 출자해서 사업을 시작했다. 정부에서도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호응해 한과 공장 설비의 80%를 지원해주었다. 10년간 사업을 지속하는 조건이었다.

마을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순항만 해온 것은 아니다. 막상 시작하고나니 바로 민원이 들어왔다. 전체 100가구 중에서 가입하지 않은 70가구가 한과사업을 못하게 민원을 넣은 것이다. 함께 하자고 제안했지만 하지 않았고 일부 주민들의 조합사업에 마을 땅을 줄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2달 동안 민원은 지속되었다.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을 텐데 어떻게 해결했을까? “매일 밤 12시까지 두 달 동안 계속 회의를 했다. 그 결과 10년 동안 사업이 잘 진행되면 조합 명의로 넘겨지게 되는 부분을 수정해서 마을 명의로 넘겨주기로 했다. 합의는 봤지만 반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해 겨울 3개월 동안 조합원들이 무료로 양로원에서 급식을 했다. 마을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기공체조를 하고 건강진단을 하기도 했다. 다양한 동아리를 운영하며 공동체 활동을 했다. 당진시에서도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곳으로 소문이 났다.” 함께 밥 먹고 얘기하며 오해도 풀고 조금씩 마을공동체를 다져갔다. 33명의 조합원은 점차 늘어 지금은 58명이 되었다. 백석올미의 조합원 자격은 단 하나다.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에 거주해야 하는 것. 그렇게 조금씩 마을과 조합은 단단해져갔다. 그 결과 2014년 체험마을로 전환할 때는 마을 주민 70%의 동의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비싸게 사고 싸게 팔자는 원칙

공동체의 위기를 넘어서자 사업의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들 모두 사업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름도 잘 안 알려진 마을에서 만든 한과를 누가 사갈까? 아니 그 전에 한과를 만드는 방법도 제대로 몰랐다. 우선 3명이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진행하는 ‘한과 전문인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오전 9시에 시작하는 교육 시간에 맞추기 위해 매일 새벽 6시에 출발해서 교육 끝나고 나면 밤 10시까지 7개월 동안 배움이 계속되었다. 김 대표는 “어떤 사업이든 그만큼 노력하고 투자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추가적인 자본조달과 판매까지 매 순간 위기가 이어졌지만, 처음 시작한 마음을 잊지 않고 똘똘 뭉쳐 이겨냈다.

가장 큰 성과는 “마을에서 비싸게 사고 싸게 팔고 있다”는 점이다. 비싸게 사는 것은 농업의 가치를 높게 보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을 위해 만든 조합으로, 값싼 중국산 농산물이 아닌 마을에서 생산된 재료만을 원료로 한다. 재료가 떨어지면 품절이다. “이윤을 많이 남기기보다 우리의 노력으로 농산물이 제값을 받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우리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싸게 파는 이유는 우리의 이름을 걸고, 우리 아들딸의 이름을 걸고 판매하기 때문이다.

올미란 뜻도 兀(으뜸 올)·味(맛 미)의 조합으로 ‘최고의 맛’이라는 뜻이며 영어로 ‘All me’도 ‘모두 나에게 오세요’라는 뜻으로 ‘맛에 자신 있으니 사가세요’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좋은 제품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기업 논리와는 맞지 않는다. ‘같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기업이기에 가능하다. 조합원 모두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사장이다. 일하는 사람 월급도 동일하다. 최저임금 수준이지만 농촌 어르신들에게 큰돈이다.”

이렇게 해서 마을로 환원된 돈이 2015년 기준 인건비 2억6천만원, 원재료 1억5천만원으로 총 4억1천만원이다. 2013년 정규직 1명에서 시작한 노인 일자리가 2015년에는 정규직 20명, 비정규직 25명이 일한다. 월급이 동일하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업 시간이 동일했을 때의 기준이다. 무리하지 않게 여건이 되는 만큼 일한다. 일이 우선이 아니고 행복한 노년의 삶이 우선이기에 퇴근 시간 1시간 전에는 모두 모여 체조도 한다. 모두가 사장이기에 가능한 구조이다. 또한 판매수당이 있어 열심히 판매한 이에게는 15%의 판매수당도 지급된다. 올해 설 명절에는 202만원 판매수당 포함 371만원을 가져간 할머니도 있었다. 신이 나서 일할 만하다. 매출 규모에서 한번 놀라고 원재료부터 인건비까지 모두 마을로 흘러들어가는 방식에서 또 놀란다. 지역의 선순환 역할을 하며 마을의 든든한 심장이 되고 있는 기업이다. 할머니들이 제대로 일을 벌린 셈이다. 그래서 백석올미마을의 콘셉트는 ‘할매들의 반란’이다.

마지막까지 함께 나이 들고 싶어

인터뷰를 마치고 나자 오전 일정으로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초빙한 가나의 협동조합 지도자들이 견학차 방문했다. 오후에는 제주도에서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성공적인 6차 산업 사례로 국내외 곳곳에서 방문한다. 이름도 생소한 마을이 유명 방문지가 되었다. 1시간 동안 설명을 마치고 30여 분 열띤 질문이 이어졌다. 마을주민들의 신뢰는 어떻게 확보했는지, 품질 유지 방안은 무엇인지 등 생소한 질문에도 김 대표는 막힘없이 답변한다. 한과 만들기 체험이 이어졌다. 한국의 전통문화까지 체험하고 배울 수 있으니 외국 기관들에게 인기 있을 만했다.

마지막으로 조합이 더 이루고자 하는 꿈을 물어보았다. “마을 요양원인 올미타운을 짓고 싶다.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는 공동체 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그동안 살던 마을을 떠나 요양원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생소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 싶지 않다. 마을에 노인요양원을 세워서 함께 나이 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한과를 많이 사주셔야 한다.” 할머니들의 반란을 지지하고 공동체 꿈을 응원하기 위해 한과 6봉지가 든 한과세트 5만원어치를 샀다.

주수원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정책위원 sociale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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