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30시간 노동제 사회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위한 시간뿐 아니라 시민들 간의 새로운 연대를 구축할 시간, 개인적 즐거움을 누릴 시간, 새로운 삶의 방법과 주체성의 모델을 창조할 시간을 허락할 것이다. … ‘일’을 노동시장의 고용체계로 규정하는 산업화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무엇이 일이고 일이 아닌지 그 정의를 일자리와 고용 여부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일을 통해 돈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그 덕에 각자의 일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오롯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며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사회에서 우리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이 ‘일’할지도 모르겠다.”
2016년 5월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전국 성인 남녀 299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행복’ 관련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가운데 행복하다는 답변은 ‘공기업 직장인’이 61.5%로 가장 많았고, 이어 ‘외국계 기업’(60.0%), ‘대기업’(54.7%), ‘중소기업’(51.1%) 순으로 나타났다. 직급별로는 과장급 응답자의 ‘행복하다’ 답변이 61.7%로 가장 높았다. 이어 ‘임원’(56.0%), ‘차·부장’(53.0%), ‘대리’(51.8%), ‘사원’(49.9%) 순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 결과대로라면 공기업에 다니는 과장급 직원 행복도가 가장 높은 셈이다.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응답자들은 ‘경제적 여유’(49%), ‘일과 삶의 조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여건’(47.9%)을 압도적으로 꼽았다.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공기업 직원 만족도가 외국계 기업이나 민간 대기업과 견줘 높은 건 사실이지만 상대적으로 더 행복하다고 해석하긴 어렵다. ‘행복하다’는 답변이 가장 낮았던 중소기업 직장인을 제외하면 응답 집단 간 차이가 5% 남짓에 그치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큰 의미를 갖는 건 같은 조사에서 일터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응답자가 꼽은 ‘경제적 여유’ ‘일과 삶의 조화로운 생활’이다.
공공기관 가운데서도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은 가장 높은 급여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중은행에 비해 영업 압박에서 자유로워 업무 강도가 낮다고 흔히 생각한다. ‘경제적 여유’ ‘일과 삶의 조화로운 생활’을 일터 행복의 주요 결정 요인으로 꼽은 잡코리아 설문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금융 공공기관은 직장인이 가장 행복해하는 일터여야 마땅하다.
급여 높지만…과연 그럴까? 최근 전·현직 임직원이 직접 작성한 기업 리뷰와 연봉·면접 정보를 제공하는 잡플래닛 자료를 통해 살펴본 결과,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 8곳(기술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 예금보험공사, 한국예탁결제원,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 KDB산업은행, IBK기업은행) 직원들 간 만족도 차이는 컸다. 복지 및 급여, 승진 기회, 업무와 삶의 균형, 사내 문화, 경영진 등을 고려한 조사에서 예탁결제원(5점 만점에 4.4점), 산업은행(4.1점), 기술보증기금(4.1점), 예금보험공사(4.0점)는 ‘4.0점’이 넘는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반면, 가장 낮은 직원 만족도를 기록한 한국자산관리공사와 IBK기업은행은 3.7점을 받았다.
직원 간 만족도 차이를 만들어낸 원인을 찾기 위해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2015년 12월 기준,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 8곳을 대상으로 일터 행복 수준을 진단했다. 공공기관 경영공시 사이트 ‘알리오’ 자료를 통해 금전 보상뿐만 아니라, 고용 안정, 차별 철폐, 승진 기회 등 직장인의 일터 만족도에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요인을 조사했다.
지난해 금융위 산하 공공기관 8곳이 지급한 직원 1인당 평균 급여는 8800만원이었다. 한국2만기업연구소가 조사한 매출 1조원 이상 대기업 직원 평균 급여(6700만원)와 견주면 약 35% 높다. 조사 대상 공공기관 가운데 가장 많은 급여를 지급한 예탁결제원의 직원 1인당 평균 급여는 지난해 1억원을 돌파했다. 전체 공공기관으로 범위를 확대하더라도 한국투자공사와 함께 두 곳뿐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처럼 높은 급여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부호가 달린다. 이미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 공공기관 정상화 정책 여파로 공공기관들은 직원의 급여성 복리후생 규모를 대폭 줄였다. 이어 최근 기획재정부가 권고한 공공기관 성과연봉제가 본격 실시되면 저성과자를 중심으로 한 실질 급여 하락은 불가피하다.
시중은행과 견줘 상대적으로 낮은 업무 강도에도,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 직원들이 급여를 많이 받는 배경으론 높은 평균 근속연수 즉, 고용 안정이 첫손에 꼽힌다. 호봉제와 연계된 임금체계 탓에 오래 일한 만큼 급여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실제 시중은행 가운데 예탁결제원과 직원 1인당 급여 수준이 비슷한 신한은행(12년 9개월), KEB하나은행(11.2년)의 평균 근속연수는 5~6년 짧다.
한편,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이 지난해 신입사원에게 지급한 1인당 평균 급여는 약 4065만원이었다. 산업은행이 가장 많은 4600여만원을 지급했고, IBK기업은행(4400여만원)과 예탁결제원(4100여만원)이 뒤를 이었다. 이는 잡코리아가 지난 8월 국내 하반기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대졸 신입사원 연봉(3855만원)보단 높지만, 4300여만원을 지급한 금융권과 견주면 10% 안팎 적은 금액이다.
금융기관 산하 공공기관 일터는 높은 수준의 급여와 고용 안정에도 불구하고 양성평등과 관련해선 개선해야 할 사항이 많은 것으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조사 결과 확인됐다. 특히 일부 공공기관에선 여성 일자리 대부분을 무기계약직으로 채우고 있었다.
여직원 10명 중 8명은 무기계약직조사 대상 공공기관 8곳의 여성 비율은 38.8%였다. 10명 가운데 4명이 여성인 셈이다. 10% 내외 수준에 그치는 5대 공공기관 여성직원 비율과 견주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하지만 일자리 질에 있어선 적잖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예가 IBK기업은행이다. IBK기업은행은 임직원 1만1077명 가운데 5572명이 여성으로, 비중만 따지면 55%를 훌쩍 넘었다. 하지만 IBK기업은행에서 일하는 여직원 2명 중 1명은 무기계약직이다. 무기계약직은 계약 기간을 정하지 않고 정규직과 같은 고용 형태로 인식되지만 급여체계와 승진 기회 등에선 정규직과 견줬을 때 처우가 낮다. IBK기업은행에서 일하는 무기계약직 가운데 여직원 비중은 무려 87%(전체 무기계약직 3064명 중 여성직원 2651명)에 이른다. IBK기업은행에 이어, 여직원 비중이 높은 한국주택금융공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체 직원 가운데 여직원 비율은 36%를 상회했지만 무기계약직 10명 중 9명이 여성이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에게 주어진 견고한 유리천장은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 전반에서 확인됐다. 조사 대상 공공기관 7곳(직급 체계가 상이한 예탁결제원 제외)에서 일하는 여직원 90%가 4급 이하 직제에 편성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반적으로 이들 공공기관 신입사원이 주로 5급으로 입사하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이들 공공기관의 ‘승진’제도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고 있는 셈이다.
이들 공공기관 8곳을 통틀어 보면, 무기계약직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80%를 상회했다. 이들의 처우는 어떨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이들 기관의 무기계약직 급여와 평균 근속연수를 조사한 결과, 정규직과 견줘 신용보증기금의 무기계약직 처우가 상대적으로 나았던 반면 한국자산관리공사의 무기계약직은 사실상 2년 계약에 최저임금을 지급하는 열악한 일터임이 확인됐다.
지난해 신용보증기금이 무기계약직 직원 1명에게 지급한 평균 급여는 5200여만원으로 정규직의 61% 수준이었다. 또한 신용보증기금 무기계약직의 평균 근속연수는 약 9년으로,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 무기계약직 평균(5~6년)에 견줘 50~60% 길었다. 반면 한국자산관리공사가 무기계약직 1명에게 지급한 평균 급여는 2490여만원으로 정규직 평균 급여 대비 3분의 1에 그쳤다. 근속연수도 2년5개월로 조사 대상 공공기관 무기계약직 중 가장 짧았다. 이외에 예탁결제원과 예금보험공사는 무기계약직이 없어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으나 예금보험공사의 경우 약 50명의 하도급 인력이 근무한다고 알리오를 통해 공시했다.
사내 기업 문화와 승진 기회 등을 살피기 위해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의 직제상 정원 현황 자료를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 공공기관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견고한 피라미드 조직 구조를 갖고 있음이 확인됐다. 특히 산업은행을 제외하면 가장 아래 직급으로 분류되는 4급과 5급 직원 정원이 70%를 상회했고, 한국자산관리공사의 그 비중이 80%에 육박했다.
수직적 조직 구조 심화직제 정원상 하급직 비중이 높다는 것은 승진 경쟁률의 심화를 의미한다. 실제 조사 대상 공공기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4급에서 3급으로 승진하기 위해선 평균 2:1, 3급에서 2급은 3:1, 2급에서 1급은 2:1에서 6:1까지 직급별 승진 경쟁률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주로 외부 인사로 채워지는 공공기관의 임원 인사를 제외하면 이들 공공기관에 입사하는 신입사원이 피라미드 조직 구조 최상위 직제인 정규직 1급으로 승진하기 위해선 최고 500:1(IBK기업은행)에서 최저 30:1(예금보험공사)의 경쟁률을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은 공무원과 견줘선 높은 급여가, 시중은행보다는 높은 고용 안정과 낮은 업무 강도가 장점으로 부각되면서 구직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해마다 가을 무렵 시작되는 금융 공공기관 공채 경쟁률은 평균 100:1에 육박한다.
하지만 입사 뒤 이들 금융 공공기관 직원들이 느끼는 일터 행복이나 만족도는 외국계 기업, 민간 기업과 견줬을 때 높지 않다. 급여 및 복리후생은 정부 정책 기조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최근 영국 <bbc> 조사에선 인공지능에 의해 일자리가 대체될 위험성이 높은 일터 10곳 가운데 2곳(회계·보험 등)이 금융권으로 조사됐다. 금융 공공기관의 장점인 높은 급여와 고용 안정성의 지속성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가파른 피라미드형 조직 구조로 인한 보수적 조직문화, 여성을 짓누르는 견고한 유리천장, 여전히 열악한 무기계약직 처우 등 금융 공공기관 일터 안의 불행 요소는 적지 않았다. 잡플래닛 조사에서 정규직 유무와 성별에 따른 차별이 덜한 예탁결제원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은데 반해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여성과 무기계약직 처우가 열악한 IBK기업은행,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의 직원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직원들의 일터 행복은 급여, 복리후생 같은 보상보다 직원 간 협력을 통해 조직과 개인이 성장·발전할 수 있도록 내부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1년에 4차례 자기가 원하는 동료를 정해 연초 목표에 대한 평가 및 피드백을 받는 페이스북코리아는 내부 구성원 간 협력을 통해 자기 성장과 조직 발전을 동시에 꾀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영면 동국대 교수(경영학)는 “단순히 돈을 벌고 생계를 잇기 위한 일터는 태생적으로 행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며 “일터에서 직원 행복은 구성원 간 협력과 개인 성장에서 비롯되는 만큼 채용, 교육, 평가, 피드백 등 인사 전반에서 이를 위한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재교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CSR 팀장 jkse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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