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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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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아주 지팡이

등록 2004-07-08 15:00 수정 2020-05-02 19:23

[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글 · 사진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작을 때 뽑아내지 않으면 금세 키가 훌쩍 커버리는 풀이 명아주다. 명아주는 주로 토끼 먹이로 쓰였지만, 어린 잎을 무쳐 식탁에 올리기도 했다. 개망초 이파리를 많이 먹으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얼굴 피부가 상한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는데, 명아주도 많이 먹으면 피부병이 생긴다고 한다. 명아주는 지팡이의 재료로 사용될 때 최고의 영예를 얻는다. 옛 글을 읽다 보면 청려장(靑藜杖)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청려장은 푸른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다.

농촌에서 자란 나도 예전에는 명아주로 지팡이를 만든다는 말은 쉽게 믿기 어려웠다. 한해살이풀인 명아주가 지팡이를 만들 만큼 크게 자란 것을 거의 못 보았기 때문이다. 몇해 전 안동의 도산서원에 갔다가, 퇴계 이황 선생이 생전에 쓰시던 1m가 훌쩍 넘는 청려장을 보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믿고 나니 보인다고, 그때부터 노는 밭에 자란 명아주 가운데 지팡이를 만들 만한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밑동이 한손에 잡히지 않고 키가 2m에 이를 만큼 큰 명아주가 정말 있었다.

노인들은 명아주 줄기가 스스로 빛을 내어 사악한 귀신을 물리친다고, 그래서 청려장을 짚으면 오래 산다고 말한다. 16세기에 쓰인 이시진 선생의 에는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에 안 걸린다”고 적혀 있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퇴계 선생의 청려장은 가지가 퍼졌던 자리에 울퉁불퉁한 옹이가 있어, 그것을 짚고 다니면 손바닥에 지압 효과가 있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말린 명아주 줄기는 단단하면서도 아주 가벼워서 힘없는 노인들의 지팡이로는 안성맞춤이다.

조선시대에는 나이 50이 되면 자식이, 60이 되면 고을에서, 70이 되면 나라에서, 그리고 80이 되면 임금이 청려장을 선사했다고 한다. 이를 각각 가장, 향장, 국장, 조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국장 이상을 짚은 노인이 마을에 나타나면 원님이 직접 나가 맞아야 했다. 다만, 어떤 옛글을 보면 지팡이는 짚는 사람보다 앞서 가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에게 선물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인 1995년 노인의 날에 대통령이 노인들에게 청려장을 선물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은 노인의 날에 새로 100살을 맞은 노인들에게 청려장을 선물하고 있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명아주를 ‘도트라지’라고 부른다. 청려장은 도트라지를 뿌리째 뽑아 말려 모양을 다듬고, 들기름을 먹인 뒤 옻칠을 해서 만든다. 도산서원 앞에서 가게를 하던 강옥남 할머니는 농촌지도소에서 재배한 도트라지로 한 장인이 만들어온 청려장을 94년께부터 팔았다. 그런데 밭에서 키워보니 지팡이를 만들 만큼 크게 자란 명아주가 많이 나오지 않아 몇해 만에 공급이 끊겼다고 했다. 지금은 문경지방 농민들이 밭에서 명아주를 재배해 청려장을 만들어 직접 팔고 있다. 요즘엔 나도 주말농장을 다녀오는 길에 길가에 자란 명아주들을 유심히 살펴보곤 한다. 지팡이를 짚을 나이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옛 사람들의 정성을 손으로 한번 느껴보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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