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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는 테러의 징표?

등록 2006-09-06 00:00 수정 2020-05-02 04:24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우리 침묵하지 않으리!’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저항한 독일 양심의 표상으로 꼽히는 ‘백장미단’의 구호다.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등 중동 각지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반대하는 평화운동가들도 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라에드 자라르는 이라크 출신이다. 건축가인 그는 현재 미 캘리포니아주에 정착해 살고 있다. 지난달 뉴욕으로 출장을 떠났던 그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8월12일 케네디 공항을 찾았다가 웃지 못할 봉변을 당해야 했다. 그가 입고 있던 티셔츠가 화근이었다. 티셔츠에는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우리 침묵하지 않으리’란 글귀가 영어와 아랍어로 각각 적혀 있었다.
“아랍어로 쓰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불안하다.” 자라르가 입은 티셔츠를 본 일부 승객들은 공항 보안당국에 뭔가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고, 그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옷을 벗든지 탑승을 포기하든지 선택을 하라”는 강요를 당했다. 공항 보안요원들과 말싸움 끝에 그는 결국 항공사 쪽에서 구입해준 다른 티셔츠로 갈아입은 뒤에야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은 자라르의 말을 따 “나는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이같은 일이 이곳 미국에서도 버젓이 벌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9·11 동시테러가 벌써 5돌을 맞게 됐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미국인들은 여전히 막연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아랍어 글귀 하나가 곧 테러의 징표로 여겨질 정도다. 부시 행정부가 틈만 나면 강조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가져왔다는 ‘성과’는 그래서 와닿지 않는다. 극단적인 두려움은 종종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이 지난 8월29일 전한 한 여론조사 결과는 두려움에 빠진 미국 사회의 비이성적 여론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통신이 전한 미 코네티컷주 퀴니팩대학 여론조사연구소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내용을 보면, 미국인 10명 중 6명은 앞으로 몇 달 안에 미 본토를 겨냥한 테러 공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대비책은? 똑같은 비율의 사람들이 “모든 공항과 기차역에서 ‘중동 출신’으로 보이는 이들을 골라내 철저한 보안 조사를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를 두고 이브라힘 후퍼 미국-이슬람 관계위원회(CAIR) 홍보국장은 “두려움과 병적 흥분 상태가 낳은 불행한 부산물”이라고 지적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극에 이른 시대, 두려움 때문에 침묵을 선택해선 안 된다는 역사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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