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설마 했던 것들의 오늘

부글부글
등록 2011-11-09 17:41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이정아 기자

<한겨레> 이정아 기자

설마가 잡았다, 등록금.

서울시장의 결정이다. “반값 등록금.” 피부관리 세게 받고 목소리 낭랑한 분 대신 꼬장꼬장하고 패션감각에 무심한데다 살짝 대머리 기운까지 보이는 분을 선택한 지 일주일 만이다. 서울시립대의 등록금이 반값이 되면 100만원대, 한숨 돌릴 만하다. 당장 내년부터다. “앗!” 계산하던 기자도 놀란다. 15년 전 낸 서울시내 사립대 등록금(약 230만원)과 비교해봐도 절반에 가깝다. 할 수 있었는데 왜 지금껏 안 하고 있었던 건가. 딱 182억원이 필요했다. 한강 아라뱃길에만 조 단위의 돈이 들었는데. 강바닥 파는 데 들어가는 돈 100분의 1만 있으면 청춘이 한숨 돌릴 수 있는데. 왜 지금껏 몰랐을까. 바꾸면 바뀐다는 것을 알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때다 싶게 반값 등록금 선언에 포퓰리즘 논란을 부추기는 고매하신 언론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대학은 포퓰리즘 공격에 동조할 겨를이 없다. 반값으로 내리기 전에도 서울시립대의 등록금은 서울시내 사립대학의 절반에 가까웠다. 반값 등록금이 반값 등록금이 아니다. 반값의 반값 등록금이 된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감사원은 지난여름 전면 실시한 대학별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광장의 촛불들을 향해 “내릴 돈이 없다”던 대학은, 알고 보니 감추고 빼돌려 자기 주머니를 채웠다. 설마 했지만, 해도 너무했다. 온갖 횡령과 배임을 감춘 A부터 Z까지 대학별로 명명된 익명은 대학을 학교가 아닌 악덕 사기업으로 만들어버렸다. 실명이었으면 몇몇 대학은 그나마 창피를 면할 수 있었을까. 이미 사립대 104곳의 곳간에 쌓여 있는 누적 적립금은 6조3455억원이다. 182억원이면 되는데. 대학은 답하지 않는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무혐의.

(어쨌거나 표면상으로는) 영등포경찰서의 결정이다. “도청 무혐의.” 한국방송은 수신료 인상을 논의하는 민주당 최고위원회 비공개 회의가 궁금했을 것이다. 아삼륙 한나라당도 마찬가지였음이 분명하다. 누가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은 그 회의 내용을 알았고, 한국방송 기자는 의심을 샀다. 한 의원은 조사를 받지 않았고, 한국방송 기자는 증거물을 분실했다. 하필 그 기자는 민주당이 수사 의뢰를 한 다음날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수사 착수 뒤 2주 동안 경찰이 압수수색을 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래도 경찰은 “방법이 없었다”고 마무리지었다. 사람이 무능한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그게 국가라면 분명히 죄다.

그분만 없었다, 부산저축은행 수사.

검찰의 결정이다. “그분은 없었다.” 8개월 동안 투입된 130여 명의 수사 인력, 박연호 부산저축은행 회장 등 전·현직 임직원,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 은진수 전 감사위원 등 정·관계 인사만 76명 기소. 불법대출 6조원, 분식회계 3조원 등 총 9조원의 금융비리. 브로커 8명을 통해 뿌린 로비자금만 44억원. 단군 이래 최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데 그 속에 딱 그분만 없었다. 여기서 그분은 그분의 그분일 수도 있고, 그냥 그분일 수도 있다. 박씨냐 이씨냐 따지지 마라, 최소한 당신이 생각하는 그분이 맞다. 소문은 무성했고 그분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나오지 않았던 그분은 언젠가 부산저축은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것이다. 다만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