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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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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에 대하여

등록 2002-06-25 00:00 수정 2020-05-02 04:22

월드컵을 계기로 붉은색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인식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것은 ‘검은색’을 둘러싼 언론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이다.

이번 월드컵을 치르면서 거둔 가장 큰 성과 가운데 하나는 ‘붉은악마’로 인해 과거 ‘붉은색’과 관련된 편견을 극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른바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비쳐졌던 붉은색은 이제 우리나라의 열정, 단합, 나아가 발전적인 에너지를 표상하게 되었다.

인간사회에서 색채는 완벽하게 가치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도덕적 가치를 투영하면서 인지된다. 따라서 색깔이란 때로는 엄청난 편견과 차별을 배태하는 중요한 상징이기도 하다. 월드컵을 계기로 붉은색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인식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것은 ‘검은색’을 둘러싼 언론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이다.

‘검은’이란 수식어의 편견

월드컵 경기 중계방송을 맡은 한 캐스터는 카메룬 선수들을 보면서 “전부 까매서 어느 선수가 어느 선수인지 못 알아보겠어요”라는 ‘실언’을 했다. 즉각 네티즌들은 이를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월드컵 관련 기사들은 사실 그보다 더 심각한 ‘말실수’로 뒤덮여 있다. 바로 이른바 ‘검은 대륙’이라고 부르는 아프리카에 관련된 것들에서 말이다.

축구팀으로 유명한 나라들은 저마다 고유의 애칭을 갖고 있다. 그 별명들은 대부분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드러내는 이름들이다. 롬멜을 떠올리게 하는 독일의 ‘전차군단’, 스포츠의 발생지임을 표시하는 영국의 ‘축구종가’, 대서양 시대를 연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같은 이름이나, 자신들의 자랑스런 민족성을 드러내는 멕시코의 ‘아스텍 전사’ 또는 터키의 ‘투르크 전사’와 같은 별칭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관한 기사는 전부 뭉뚱그려서 ‘검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별칭이 ‘불굴의 사자’였던 카메룬은 ‘검은 돌풍’으로 둔갑하고, ‘슈퍼 이글스’였던 나이지리아팀은 ‘검은 독수리’로, ‘테랑가의 사자’였던 세네갈은 어느새 ‘검은 사자’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우리 언론은 무표정한 표정 때문에 서양에서 ‘슬픈 스트라이커’로 불리던 나이지리아 출신의 폴란드 선수 올리사데베를 ‘검은 킬러’로 부름으로써 그에게서 흑인이라는 인종적 정체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원래 검게 생겼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흑인에게는 모두 ‘검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백인에게는 피부색과 관계없이 초록색(아일랜드)이나 아주리(파란색·이탈리아), 혹은 오렌지(네덜란드)와 같이 다양한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구가 만들어낸 제국주의적 인종관을 그대로 수용하고, 오히려 서구보다도 더 흑인종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검은색은 서양의 역사에서 아주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색이다. 특히 기독교가 유럽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중세에 들어서서 천국을 상징하는 ‘흰빛’과 대조적으로 ‘검은빛’은 지옥을 상징하는 색깔로 자리잡았다. 검은색은 과부의 색, 악마의 색이었으며, 성직자가 입는 검은 옷은 지옥보다 더한 고행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세 유럽에서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은 엄청난 핍박을 당하기도 하였다.

서구가 만든 흑백의 구도

제국주의가 시작되면서 서구는 아프리카에서 마구 잡아들인 노예들을 인권이 없는 열등한 족속으로 규정하여야만 하였고,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피부색에서 구체적으로 ‘검다’는 요소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과학자들은 검은 피부는 과도한 열에 노출되어 생긴 것이므로 그런 사람들은 이성이 없다느니, 피부가 검은 사람들은 원숭이에 가깝다느니, 심지어 그들은 기생충조차 검다느니 하면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백인과는 전혀 다른, 인간 이하의 집단으로 규정했다.

인종주의가 흑백의 구도에서 더 나아가 동양인을 포괄하면서부터 동양 사람들에게는 ‘노란색’이 강조되기도 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정신적으로는 서구화되었지만 겉모습은 어쩔 수 없는 동양인이라는 것을 비아냥거리며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을 ‘바나나’라고 부르곤 한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에게 덧씌워지는 인종적 편견은 이처럼 색깔이라는 탈을 쓰고 있다. 그런 편견은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부터라도, 종종 사극에서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시지요”라고 말할 때나 쓰는 그런 부정적 의미의 ‘검은색’을 특정한 집단에게 무차별적으로 덮어씌워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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