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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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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위한 사과

등록 2012-10-20 13:29 수정 2020-05-03 04:27

2000년 초반의 유행은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비롯된 동창회였다. 나도 그 유행에 적극 동참했다. 추억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만날수록 반가웠고, 만나는 횟수를 더해갈 때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얼굴이 신기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만남이 이어지다 보니 급기야는 보고 싶지 않던 아이들까지 만나게 됐다. 나에게 돌을 던진 아이가 나타나고, 먹던 과자를 던진 아이가 나타나고, 단칸방 사는 주제에 반장이 웬 말이냐고 비웃던 아이도 나타나고, 심지어 얼굴에 침을 뱉은 아이도 나타났다.

사과받으라 강요하는 사회

그 아이들은 한결같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얼굴로 나타났다. 정말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손을 내미는데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무서웠다. 정말로 그 기억을 못하는 아이들도 무서웠고, 모른 척하는 아이들은 더 무서웠고, 아이들은 다 그러면서 크는 거라며 별일도 아닌 걸 마음에 품는다고 웃는 아이들은 정말 무서웠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세월 지났으니 마음 풀고 웃으며 보자, 정도가 사과라면 사과였다. 어른답게, 초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웃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모든 기억과 다시 헤어졌다.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사과를 강요하는 사회가 싫다. 정확하게는 사과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사회가 무섭다. 관용이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로 한마디 해놓고 다짜고짜 사이좋게 지내자는 태도도 이해할 수 없다. 사과가 무슨 선물인가, 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주게. 몸이 다쳐도 낫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마음이 다치면 더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오다가다 팔 한 번 툭 치고 지나간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의 인생을, 인격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여기저기에서 화해와 화합을 위한 제스처가 요란하다. 여당 대선주자는 아예 사과 방문을 첫 공식 일정으로 잡았다. 그런데 그 절차와 방식이 사뭇 무례해 보인다. 문제의 본질이나 상대의 심중에 대한 헤아림 없이 다짜고짜 찾아가는 것은 기본, 사과의 내용을 들어보면 반성인지 변명인지 알 수가 없다. 사과하려는 상대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과란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다. 누군가에게 잘못을 고할 때는 이제 그만 잊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실수를 두 번 저지르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업화라는 명분으로 어린 노동자의 삶을 유린하고 끝내 분신으로 내몬 과거사에 대해 사과한다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노동자들의 내몰린 삶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는 뜻이어야 하지 않을까. 전태일재단을 찾아가는 일이 진정한 사과가 되려면 같은 마음으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도 만나야 하는 건 아닐까. 독재와 산업화의 그늘이 잉태한 여전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도 책임도 없이 지나간 과거사만 좇아다니며 과거사로 발목 잡는 건 부당하다고 항변하는 모습은 좀 이상하다. 화해와 통합을 주장하면서도 ‘우리’의 꿈 대신 ‘내’ 꿈을 택한 슬로건이 차라리 더 솔직한 속내처럼 보인다.

화해, 태도와 자세의 연속

어떤 상처는 진심 어린 사과로도 덮을 수가 없다. 그렇더라도 화해는 가능할 것이다. 나는 화해와 통합이란 찰나의 순간이 아니라 태도와 자세의 연속이라고 믿는다. 잊어달라고 강요하거나 잊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아서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국민대통합위원회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부디 그래주길 바라고 싶지만, 통합을 이루겠다는 조직 내부도 통합되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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