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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경제

등록 2011-11-24 14:13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 김대중

일러스트 김대중

뉴스를 보니 아시아에서 경제성장률보다 물가성장률이 더 높은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나는 한국에서 우유를 좋아하는 아이 때문에 매일 가게로 우유를 사러 갔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우유 1ℓ에 1900원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을 떠나고 몇 달 되지 않은 지금, 한국의 우윳값이 2300원이란다. 아무리 환율이 높다 해도, 2300원을 유로로 따지면 대략 2유로에 육박하는 가격이다. 그러면 이곳 독일 베를린의 우윳값은 얼마인가. 놀라지 마시라. 단지 50∼60센트(약 770∼924원)다. 현재의 높은 환율로 따져도 1천원이 채 안 된다.

소중하고 귀한 대접받는 1센트

한국에서는 과일 사먹기가 겁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과일을 마음껏 사먹는다. 토마토가 1kg에 1유로(약 1540원)가 안 될 때가 많다. 야외에 서는 주말시장에 가면 더 싸게 살 수 있다. 말하자면 이곳에서는 모든 생활 물품을 동전으로 살 수 있다.

한국에 살 때 우리 집에는 동전을 쓸 일이 없어 곳곳에 늘 동전이 쌓여 있었다. 동전을 모아놨다가 은행에 가서 눈치를 보며 지폐로 바꾸곤 했다. 일단 장에 가면 1만원짜리 몇 장은 챙겨야 했고, 그나마도 돌아올 때는 몇 가지 안 산 것 같은데 수중에 1만원짜리는 허망하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마다 뭔가를 샀는데도 꼭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1센트 동전도 요긴하게 쓰이니, 뭘 샀으면서도 돈을 하나도 안 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국 것보다 훨씬 큰 요구르트 한 통이 32센트다. 우리나라에서 새로 나온 10원짜리보다 훨씬 작고 가벼운 그 1센트가 얼마나 소중하게 쓰이고 귀한 대접을 받는지. 한국에서는 10원짜리 동전을 쓸 일이 없어 그나마도 발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하고,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지 오래인데 말이다.

독일의 가게 안에는 맥주병 같은 유리병이나 플라스틱 음료수통 같은 것을 집어넣는 ‘판트머신’이라는 기계가 있다. 내가 사먹은 음료수병이나 통, 혹은 길에서 주운 것을 거기다 넣으면 액수가 찍힌 영수증이 나온다. 그것을 물건 살 때 계산대에 내밀면 물건값에서 공제해주거나 돈으로 내준다. 그런 일을 이곳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한다. 아이, 노인, 점잖은 신사, 여성은 가게에 갈 때 시장가방 안에 판트머신에 넣을 병이나 통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유리병을 갖다주면 물건값을 공제해주는 제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는 대부분 쓰레기장의 재활용통에 그대로 버려진다.

베를린은 확실히 서민이 살기에 그리 팍팍하지 않다. 베를린에서 지방선거가 있기 전에 집세를 못 올리게 하는 세입자 시위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곳에서는 한국처럼 집주인 맘대로 집세를 올리지 못하는데도 그렇다. 대부분 세입자가 한번 그 집에 들어가면(집주인이 세입자를 나가게 하려면 많은 돈을 내줘야 한다) 그 집에서 살고 싶을 때까지 살 수 있다. 물론 집세는 대부분 처음 들어갈 때 계약한 그대로다.

베를린이 하는 거 우린 왜 못하나

큰 가게보다는 작은 가게, 작은 가게보다는 야외 시장에 사람들이 더 북적이는 대도시 베를린(우리나라와 완전히 반대다). 이 도시에는 확실히 서민경제가 살아 있는 것 같다. 서민이 경제적 부담 없이 먹고 싶은 것은 사먹을 수 있고, 집 없는 사람이 쫓겨날 염려를 하지 않고 집값 걱정 없이(집세를 못 낼 형편인 사람은 사회보장금을 받아서 집세를 낸다) 살 수 있으며,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곳. 베를린에서 하고 있는 것을 왜 우리나라에서는 하지 못할까.

우윳값이 비싸서 아이들에게 우유를 못 사먹이고, 집세 때문에 허리가 휘고, 비싼 학비 때문에 공부를 포기해야 할 정도인 나라의 정부는 과연 누구를 위해서 존재할까.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는데 과연 정부라 할 수 있을까. 동전으로 살 수 있는 나라의 국민을 보며 내 심사가 착잡한 이유다.

공선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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