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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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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모독

등록 2008-11-18 14:31 수정 2020-05-03 04:25

변호사가 되고 보니, 남 일이 아니긴 하더라. 한 다리 건너라도 인연이 있는 재판장을 만나면 마음이 편하고, 담당 검사가 학교 선배라면 약간 기대도 했다. ‘동기 예우(?)’라도 받을까 모르는 사법연수원 동기랑 친한 척한 적도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엄두도 못 낼 것을, 아는 후배가 담당 판사면 전화로 절차 진행을 상의하기도 했다. 내놓고 광고는 못해도, 상담 사건의 담당 판사가 친구일 때엔 “그 판사랑 잘 안다”고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검사님이랑 잘 아시죠? 그 검사님 담당 사건을 하나 알고 있는데….” 정체불명의 전화를 “그분을 안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찾아오는 사건은 안 한다”며 끊으면서도, 속으로는 ‘그냥 맡아서 해볼까? 무리하지 않고 정도대로 하면 되잖아’ 후회한 적,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런 나를 발견하면 부끄럽고 당황스럽다.

의심이 생기기 시작할 때

법정모독.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법정모독.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재판부가 정해지면 전문 분야랑 상관없이 그 재판장과 같은 기수 변호사를 담당 팀에 포함시키는 어느 로펌이 비난을 받자, “여러 전문가를 모아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는 게 무엇이 잘못이냐, 위법한 일을 하자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팀을 구성하는 것뿐”이라며 억울해하는 그 회사 소속 친구를 보며 동조까지는 아니지만 별로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는데, 그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나 대법관을 알 주제는 아니지만, 헌재 연구관보(補)로 있는 친구를 만나면 “대통령 탄핵 사건은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어본 적도 있고(물론 내 친구는 그런 논의를 알 ‘급’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나를 한 대 툭 치고 말았다), 친척들이 “여배우 아무개가 이혼한 진짜 사연이 뭐야? 법원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있을 거 아냐”며 채근을 하면 “그러게 좀 알아볼까?” 농담으로 되받기도 했다.

아는 사람한테 정보를 얻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데 뭐가 이상해, 하고 변명하고 싶지만 사실 다른 데는 몰라도 이 동네가 그러면 안 된다는 것,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이 나라가 연줄과 뒤꿍꿍이로 돌아가는 나라여도 법만은 투명한 절차와 공정한 게임의 룰을 가지고 진행돼야 한다고 믿어왔다. ‘사법개혁’ 하면 전관예우가 제일 먼저 문제되는 이유도 투명한 절차와 공정한 게임의 룰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법과 관련된 부분이 최소한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잃을 때, 아니 투명하거나 공정하지 않다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할 때, 이를 기반으로 쌓아올린 사회가 균열하고 웬만해서는 그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적어도 법이 쌓아올린 체계 속에서, 그 법으로 먹고사는 나는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판사님 아는 변호사를 추가로 선임하자”는 의뢰인들에게 “법원이 그렇지 않다”며 큰소리치고, “판사님이랑 통화해보셨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결과를 미리 알려주는 일은 없다”며 화도 냈다. 그리고 혹시 내가 그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반성이 되고 조심스러웠다. “잘 아는 변호사 인사 한 번 더 받아주고 기록 한 번 잘 봐주는 게 무슨 문제냐”고 말하는 판사를 보면 얼굴이 화끈거렸고, “주심 판사랑 미리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대충 결론이 이렇게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으면 부끄러웠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대통령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장관이, 재판 결과도 나오기 전에 “헌법재판소와 접촉해보았는데 위헌이란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정부가 법안을 내고 국회가 정한 세금을 놓고 ‘잘못 만든 위헌 법률’이라고 말을 바꿔 정부 의견서를 내는 것도 황당했지만,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도대체 얼마나 오만하면 저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나. 정말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한 나라의 최고 관료라는 사람이 헌정 질서를 아무렇지 않게 망가뜨리는 현실. 그래서 나는 또 부끄럽다. 이런 나라에서 법으로 먹고사는 것이.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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