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오전 11시를 조금 넘겨 집회가 시작됐다. 내리붓는 빗줄기에 서늘한 바람까지 더해져 손과 발이 오들오들 떨리더니 금세 온몸에 한기가 찼다. 하지만 점심시간을 맞아 쏟아져나온 재능교육(주) 직원들은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빠르게 사라졌다. 재능교육 투쟁을 처음 접한 것이 99년이었으니 올해로 10년째. 외로워 보이는 투쟁에 ‘뭐 그리 싸울 거리가 많냐?’ ‘농성하고 집회하는 게 질리지도 않냐?’고 대놓고 물었더니 재능교육 노조위원장은 대뜸 “오늘 집회가 1천만원짜리”라고 답한다.
이랜드 250억, 기륭 54억, 코스콤 13억
“학습지 교사도 노동자”라며 “당당하게 가르치고 싶다”고 외치는 이들이 이번 투쟁을 시작한 건 지난해 12월. 부당영업 근절과 해고협박 철회, 수수료제도의 전면 개정을 외치며 회사 앞에 천막을 쳤다. 회사 쪽은 곧바로 용역과 구사대를 동원해 천막을 짓밟더니 새해 들어 법원에 집단행동, 영업방해 등을 이유로 한 가압류를 신청했다. 학습지 교사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법원은 회사 쪽의 손을 들어줬고, 8명의 노조간부에게 5천여만원의 가압류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 액수는 2월 한 달분에 지나지 않는다. 회사 쪽은 3월과 4월에 진행된 농성과 집회 등에 대해 1인당 4천만원에서 5천만원의 책임을 주장하며 또 법원에 가압류를 신청했다. 그리고 지금도 집회·농성 현장에서 명예훼손이 될 만한 구호, 회사 영업을 훼방하는 행위 등을 기록하며 사람별로, 월별로 ‘정산’을 계속한다. 그렇다 보니 회사 정문 앞에 50여 명이 모여 1시간 남짓 구호를 외치고 헤어진 이날 집회도 어림잡아 1천만원짜리.
회사가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노조를 위협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1년 투쟁 때도 회사는 12명을 해고하고, 9억2천만원의 가압류를 신청했다. 물론 3년간에 걸친 투쟁으로 2004년 회사가 이를 철회하긴 했지만 그 3년, 참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대부분 30대 후반에 두세 명의 자녀를 둔 가장이 가압류 탓에 3년간 한 달에 몇십만원밖에 가져가지 못했으니 은행빚 내고, 카드깡 하고, 결국 사채까지 빌려쓰며 살았다. 울분을 토하며 회사를 떠난 이는 그나마 양반. 생활고와 빚 독촉에 시달리다 이혼한 가정도 있다. 노동조합을 탈퇴하고 회사에 손바닥 비비며 관리자가 되겠다고 설치는 인생도 있다. 그러다 보니 가압류의 고통을 뼛속 깊이 경험한 이들에게 ‘투쟁 과다’란 말은 정말 설움이 복받치는 얘기다. 투쟁 강도와 시간에 정비례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압류는, 노동자들의 두려움과 불안과도 정비례한다. 팍팍한 생계에 지치는 몸과 마음과도, 가정의 곤두박질과도 정비례한다.
가압류는 비단 재능교육 노동자들만 괴롭히는 게 아니다. 이미 두산중공업의 배달호, 세원테크의 이해남, 한진중공업의 김주익 등 여러 노동자들이 가압류의 위협 속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80만원 인생으로 살다 버려지는 운명을 거부하며 450여 일째 투쟁하고 있는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에겐 250억원에 이르는 가압류가 청구돼 있다. 그들은 물론 그들의 자녀까지 평생 일해서 갚아도 갚지 못할 금액이다. 1100여 일을 싸우고 있는 기륭 노동자들 역시 54억원의 가압류에 손과 발이 묶였고,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13억여원에 이르는 가압류에 시달리고 있다. 이 시대 싸우는 모든 노동자들이 온몸과 삶으로 손해배상 가압류의 포화를 맞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는 세워지지 않는다. 자본과 정부는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초지일관 ‘불법’으로 매도하고, 법원은 사람들 사이의 정의는 외면한 채 법전만 암송한다. 노동자의 처지와 요구를 귀담아듣기도 전에 또 데모질이냐며 눈살을 찌푸리며 경제를 운운하는 눈길은 그 무엇보다 가압류를 정당화한다.
정의를 세우는 길
하여 외로운 투쟁의 연속이다.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지고, ‘무노동 무임금’ 원칙 속에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알바’를 뛰고 빚을 내다 신용불량자가 속출하는 사업장도 많지만, 투쟁을 멈출 순 없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노동이 주머니를 강탈한 것도 모자라 등골을 휘게 하지만, 가압류의 위협에 무릎을 꿇을 순 없다. 투쟁은 노동자들에게 정의를 세우는 길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처절한 온몸의 증언 앞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번호로 유해정씨는 연재를 마칩니다. 김진 변호사가 바통을 이어 ‘노 땡큐!’ 필진에 참여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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