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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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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는 학교에서

등록 2012-10-24 18:34 수정 2020-05-03 04:27

또 죽었다. “공부 말고는 뚜렷한 취미도 없었다”던 한 여고생이 친구에게 ‘꿋꿋하게 잘해라, 나는 간다’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아파트 창틀에서 몸을 던졌다. 지난해 12월 이후 성적비관·학교폭력 등을 고민하다 자살한 중고생이 대구에서만 벌써 11명째다.
먹은 게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던 날, 그 소식을 듣고 울컥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학교의 재출발’이라는 이름의 초등학교 개혁안 연설에서 “교육은 사회 프로그램”이라며 “숙제는 집보다 학교에서 해야 한다”고 밝혔다는 뉴스 말이다. 어떤 학생들은 집에서 가족·친지의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없기에 교육 기회의 평등을 위해 숙제를 없애는 게 좋겠다는 취지란다. ‘아,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구나’ 생각하는데, 딸꾹질이 나왔다.
한국에서 숙제는 쟁점도 아니다. 대다수의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 공부보다 사교육에 목매는 현실에서 숙제 따위가 뭐 대수란 말인가.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수학 사교육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한 학기 이상 선행학습을 했다’는 학생이 초등학생 64.2%, 중학생 56.3%, 고등학생 62.9%다. 대략 10명에 6명꼴로 학원이나 과외를 통해 수학을 한 학기 이상 미리 배웠다는 건데, 이래서야 학교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선행학습형 사교육’은 여러모로 문제다. 사회적으로는 학교 진도에 맞춰 공부하려는 다른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수업권을 침해하는 불공정 행위다. 유럽 등 이른바 ‘교육 선진국’에서는 선행학습을 한 사실이 드러나면 학부모가 학교에 불려간단다. 학생 개개인의 학업 성취도 측면에서도 유해하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연구에 따르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선행학습을 한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에 견줘 성적이 떨어진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교육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성인 1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사교육기관의 선행학습이 문제’라는 응답이 67.5%, ‘선행교육 금지 제도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59.5%였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가 “적어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단계까지는 아이들을 (선행)학습을 위한 (과외 등) 사교육에서 해방시켜줘야 한다”며 “‘아이들 인권법’(가칭)의 형태로라도 규제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고 밝힌 데에도 이런 사정이 작용했을 터.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아예 ‘학교 교육과정에 앞서 (학원 등) 교육 관련 기관이 제공하는 선행학습형 사교육’을 규제하는 ‘선행교육금지법’(안)을 마련해 입법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학생인권 조례조차 논란이 되는 마당에 이 법안의 국회 통과가 쉬울 것 같지는 않다. 설혹 법안이 어렵사리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한국에서 ‘선행학습형 사교육’을 뿌리 뽑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가차 없는 입시경쟁에 내몰린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아프게 다짐할 것이다. ‘점수와 학교 간판으로 모든 걸 평가하는 사회의 잣대가 달라지지 않는 한, 모두 함께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내가 먼저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이것은 ‘수인(囚人)의 딜레마’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답이 있는데도, 타인을 신뢰할 수 없으므로 내 이익을 지키려면 배신을 일삼을 수밖에 없다고 믿게 되는.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사고도 질병도 아닌 자살인 한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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