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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 기어이 나오고 말았다

등록 2012-09-11 20:05 수정 2020-05-03 04:26

기어이 그 얘기가 나오고 말았다. 거세. 먼 옛날 중국의 사마천이 당했다는 궁형. 박인숙 새누리당 의원 등 국회의원 19명이 성폭력 범죄 대책의 일환이라며 발의한 법안의 핵심 내용이다. 법안은 검사의 구형과 판사의 판결로 성폭력 범죄자의 고환을 강제 적출하도록 했다. 당사자의 동의 여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궁형은 고려·조선시대에도 없던 형벌이다. 국가에 의한 강제 거세형은 지금 지구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문명의 표상인 신체 절단형을 주장하기 전에, ‘강간’이라는 옛말을 두고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까닭을 생각해봐야 한다. 성폭력은 ‘미친 성욕’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범위를 최대한 좁혀도 ‘성욕+정복욕+지배욕’ 따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고환을 거세한 성범죄자가 아동 성범죄를 다시 저지른 사례 보고도 여럿 있고, 물리적 거세가 폭력 성향을 오히려 높인다는 연구도 적잖다. ‘성욕 제거=성폭력 예방’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관 출신인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법안을 만들 때 헌법적 가치를 고려해달라”고 주문할 정도니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효력을 발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위헌적 법안이 발의된 건, 끊이지 않는 성폭력 범죄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공포·분노에 편승해 이득을 취하려는 정략이 작용한 혐의가 짙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사형’을 입에 올린 것도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박 후보는 “‘그러면 너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사형제 폐지 반대를 넘어 본보기 차원의 ‘사형 집행’이 필요하다는 말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한국에선 김대중 정부 이래 14년8개월간 사형 집행이 없었다. 국제적으로 ‘실질적 사형폐지국’(사형제가 존재하지만 10년 이상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은 나라)으로 분류된다. 확정판결일로부터 6개월 안에 법무장관이 사형 집행을 명령하도록 한 형사소송법 조항이 있는데도, 정부가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은 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국제 인권법이 사형을 반문명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형은 100% 불가역적 형벌이다. 오심을 바로잡을 수 없다. 죄 없는 시민을 국가가 살해할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 사실 흉악범의 재범 우려를 영구적으로 제거하겠다는 사형의 목적은 감형 없는 종신형으로도 이룰 수 있다. 그런데도 사형 존치론이 사라지지 않는 건, 수천 년 전 함무라비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 ‘응보의 정의’ 감정 탓이 크다. 그러나 ‘죽일 놈’이 많아지면 ‘곱게 죽여서는 안 될 놈’을 고르기 마련이다. 인간 세상의 섭리다. 참수, 능지처참, 육시, 부관참시, 구족을 멸한 연좌제 따위가 역사에 명멸했던 까닭이다.
강제 거세와 사형 집행 주장엔 인권 감수성이 없다. 이들은 대다수 성폭력 범죄자에게서 가족·사회와 이어진 유대의 끈을 발견하기 어렵고, 사회적 약자와 취약 계층에 성폭력 피해자가 몰려 있는 현실이 뜻하는 게 뭔지 묻지 않는다. 시대의 참혹에 맞서려면 치안뿐만 아니라 서로를 보살피는 가족·사회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한 아이를 위해선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호소를 외면한다.
그래서다. ‘대통령을 선택하는 가장 옳은 기준’으로 인권을 제시한 박래군 인권재단 상임이사의 지적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건. 인권의 프레임으로 12월 대선을 맞이하고 싶은 이들에게 (클 펴냄)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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